나는 <오아시스>가 대단히 훌륭한 영화이고, 상업영화로서 도달하기 힘든 지점에 이른, 우리 영화사의 커다란 획득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그러나 이 영화가 장애자의 현실을 다룬 감동적인 영화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정성일씨가 지적하듯이 ‘누구라도 하여튼 지지할 수밖에 없는’ 소재를 가지고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거쳐 ‘뻔한’ 결말에 이르는 영화에 그치기 쉬웠을 것이다. <오아시스>는 그러나 그와는 정반대의 지점에 서 있다. 즉 <오아시스>의 구조는 매우 다층적이고, 그 의미망은 단순치 않으며, 그 내용과 형식은 수미일관하게 삶의 일원적 의미, 영화의 일방적 의미를 강요하는 시각의 부당함을 드러내는 데 맞춰져 있다. 그리고 그 전략도 크고 힘준 외마디 구호로서가 아니라, 마치 공주의 듣기 힘든 목소리처럼, 종두의 횡설수설과 갈지자 걸음처럼, 낮고 드러나지 않게 스며들어가 있다. 그것이 내가 <오아시스>를 최상급의 형용사로 부를 수 있게 하는 이유이다.
아니다, 형식과 내용의 일치에 성공했다
정성일씨는 <오아시스>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속 다른 등장인물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주인공 두 사람의 입장을 이해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그 유일한 시점을 강요하고 있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오아시스>의 이야기는 종두의 입장에서, 공주의 입장에서, 그리고 물론 그 둘의 입장에서 볼 수도 있고, 주변 인물들의 입장에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 중 누구와도 동일시하기는 쉽지 않다. 영화가 그렇게 배려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의 주인공 행세를 하면서 종두처럼 지속적인 공감(sympathy or empathy)을 사지 못하도록 그려져 있는 인물은 좀처럼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그가 가진 ‘전과3범의 사회부적응자’라는 명함 때문만은 아니다. 사회적 낙오자나 흉악한 범죄자까지도, 아니 오히려 그런 인물들을 온갖 동일시적 장치를 통해서 쉽게 이해할 만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영화다. 이창동 감독은 <오아시스>에서 그런 영화적 장치를 쓰지 않겠다고 작심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섣부른 동일시와 그에 기초한 단기적이고 선택적이고 필요에 의한 이해보다는 인간에 대한 몰이해의 근원이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한 탐구가 더 중요하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오아시스>는 조작하지 않으려는 조작에 의해서 인간과 세계의 참된 모습을 얻으려는, 형식과 내용이 일치된 영화 만들기의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 전략은 성공했다. 종두라는 이 ‘깨는’ 인물을 이해하는 것은 그가 이해의 대상으로서만이 아니라 이해하는 주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오아시스>는 훌륭히 보여준다. 즉 중요한 건 내가, 우리가 종두를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가 우리를, 세상을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엄마의 생일잔치에 공주를 데려왔다고 형과 동생으로부터 닦달을 당하자, 종두는 동생에게 말한다. ‘나는 니가 무슨 이야기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그렇다. 우리가 그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것처럼, 그 역시 주위의 사람들과 이 세상이 너무 이상한 것이다. 무슨 일만 하면 잘못되고, 잘못되었다고 하고, 욕하고 때리고 훈계하고, ‘니가 정말 싫다’ 그러고, ‘너 변태지’라고 딱지 붙이고…. 종두가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정신없는 풍경, 고층아파트 복도에서 내려다보는 현기증나는 세상, 그것은 얼마나 이상한 것일까 그러므로 <오아시스>는 우선 종두가 바라본 이상한 세상의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정성일씨처럼 종두가 좋은 사람이냐, 그렇지 않은 사람이냐, 그가 앞부분에서 한 행동이 강간이냐 아니냐, 그가 뒷부분에서 하는 행동이 성자의 그것이냐 아니냐, 그래서 관객이 그를 동일시하는 것이 가능하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완전히 초점을 잃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레이블을 붙일 대상, 동일시하기 싫어도 동일시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든 말든 그 자신이 이해하고 행동하는 주체로서 던져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를 주체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동일시나 이해나 사랑 같은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오아시스>가 종두를 통해 던지는 메시지는 그것이다. 이처럼 나와 타인의 관계맺음의 기본에 대해 소상한 자문을 던지는 영화를 본 일이 있는가
안 된다, 이분법은 안 된다
<오아시스>는 공주의 입장에서 읽어본 세상일 수도 있다. 그녀 역시 동정이나 측은이나 이상화의 대상이 아니라, 느끼고 사랑하는 주체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은 또 지적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정성일씨는 공주의 환상이나 사랑도 종두를 위해 바쳐지고 있고, 그래서 여기서 진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과연 그런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녀는 실제 속에서나 그녀의 환상 속에서나, 거침없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욕구하는 것을 뚜렷하게 밝힐 줄 아는 여자다. 그녀의 거울 속으로 종두가 들어오고 자신에게 폭력을 가했던 사람을 사귀게 된다는 초반의 설정에 혐의를 두는 것이 어느 정도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하지만(나는 그것도 사랑에 담긴 필연적이고 비극적인 폭력성에 관한 솔직한 고백이라고 본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사랑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는가이고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냐 하는 것이다.공주는 물론 종두를 위해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주는 여자이기도 하지만, 그의 머리를 장난삼아 때리는 여자이기도 하고 화를 낸다고 면박을 주는 여자이기도 하다. 불편한 장소에 불러냈다고 화내며 버팅기기도 하는 여자며, 자고 가라고, 그만하지 말라는 표현을 하며 종두를 다룰 줄 아는 여자다.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것은 종두가 공주와 있을 때는 말이나 행동이 매우 자연스러운 인간이 된다는 점이다. 이것이 관객의 동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조작인가 아니다. 그것은 공주가 종두 속에서 ‘인간’을 보았다는 것을 말하며, 그들의 사랑이, 앞서 내가 지적했듯이, 종두에 대한 공주의 인정에 기초해서 성립할 수 있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이것이 왜 바쳐진 것인가 정성일씨의 말처럼 종두는 공주의 ‘바쳐진’ 사랑에 의해 ‘변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발견된 것이고 감춰진 모습이 드러난 것일 뿐이다. 그것은 공주라는 사람의 눈밝음을 가리키는 것이며, 나아가 사랑이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소유욕이나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어떤 발견과 자기긍정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모순 속에서 단호히 보여주는 것이다.
정성일씨가 이런 점들을 고의가 아닌 한 보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사고에 내재하고 있는 뿌리 깊은 이분법과 관련있는 듯하다. 그는 <오아시스>를 보면서 환상과 실재를 뚜렷이 구분하고, 앞의 것의 의미를 폄하하고 뒤의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공주와 종두가 벌이는 공주마마와 장군 ‘놀음’, 즉 그들의 사랑 ‘놀음’이 환상에 불과한 것이고, 비참한 그들의 실재를 변화시킬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혹은 그런 식으로 값싸고 쓸모없는 환상에 의해 실재를 대체하려 한다고 감독을 질책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종두와 공주의 사랑은 한낱 힘없는 환상에 불과한 것인가 사랑이라는 영역에서는 환상과 실재가 구분되지 않는다. 아니 그 영역에서는 환상이 곧 실재가 된다. 이것은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아는 일이다. 그 주체가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가난하든 부자이든, 그들의 현실이 비참하든 그렇지 않든, 사랑은 두 사람이 함께하는 환상을 통해서 성립하는 것이고,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이미 그들의 환상은 현실로 변화해 그들의 현실에 깊은 영향을 끼치는 어떤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아시스>에서 세개의 환상신이 편집에 의해 따로 붙여져 있지 않고 한신 안에서 실재와 뒤섞여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사랑이라는 현상에서의 환상과 실재의 불가분성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영화에서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환상인가, 라는 문제까지 질문하고 반성하는 소격효과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위험하다, 관객을 향한 결정론적 시각
정성일씨의 <오아시스> 비판글이 내포한 문제점 중 가장 위험한 것은 관객을 보는 그의 결정론적 시각이다. 그는 줄곧 이 영화가 관객에게 일정한 입장을 강요하고 그 자리에 가둠으로써 좋지 않은 영화다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감독이 의도한 조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그러지 않으면 영화를 볼 수 없다고 한다. 이것은 참으로 무지막지할 정도로 근거없는 생각인데, 왜냐하면 영화는 보는 사람마다 그 보고 느끼는 행위를 통해 영화에 참여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화를 보는 중에도 부단히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도 정성일씨는 마치 영상물등급위원회가 관객을 변별력 없는 유아들로 상정하는 것과 똑같은 논리를 편다. 즉 ‘<오아시스>는 대책없는 당신에게 거짓 환상을 믿도록 부추기며, 그래서 나쁘고, 그러므로 거기에 감동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정씨 비판의 요체다.관객을 걱정하는 척하는 정성일씨의 태도는 그러나 실은 자신의 논리가,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거나 ‘감동’받는 관객에 대한 불쾌에 기초하고 있음을 감추려는 책략에 불과하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오아시스>가 주는 것은 ‘안심’에 불과하고 ‘실천’을 가로막고 있다고 말한다. 정씨의 비평이 목표로 하는 것은 무엇일까 또는 그는 영화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관객은 한편의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되고, 쉽게 ‘감동’받거나 더구나 ‘안심’해서는 안 되며, 관람 뒤 어떤 ‘실천’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정씨는 관객의 눈물과 감동과 안심의 의미를 알 수 있는가 관객의 실천이 어디서 시작해 어디서 끝나는지 그는 어떻게 아는가 관객이 ‘감동’받아 ‘실천’할지, ‘안심’하고도 ‘실천’할지, ‘감동’받지도 ‘안심’하지도 않고 ‘실천’할지 그는 알 수 있는가이영하/ 영화 프로듀서·FnC 미디어 제작이사 edlee@fncmed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