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Enjoy TV > TV 가이드
신데렐라 드라마의 변화상 보여주는 <현정아 사랑해>
2002-10-10

왕푼수 왕자가 떴다!

또 한명의 왕자가 탄생했다. “재벌3세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곧장 미국 유학, 가문의 영광을 이어가기 위해 당연히 경제학 전공, 귀국과 더불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이사로 초고속 승진, 현재 훌륭한 최고 경영자가 되기 위해 수업 중이며 ‘소탈하나 가볍게 보이지 않도록’ 철저하게 이미지 관리를 하고 있음.” 이 정도 프로필이면 신데렐라와 사랑에 빠질 자격은 충분히 갖춘 셈이고, 남은 문제는 ‘어디서 어떻게 신데렐라를 만날 것인가’다. 파티를 열어 신데렐라를 초대하는 건 워낙 낡은 수법이라, 왕자는 직접 저잣거리에 나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 왕자, 여느 왕자들과는 달리 좀 웃기는 구석이 있다. 회사에서나 집에서는 재벌3세의 풍모를 만방에 떨치던 그가, 평민들과 어울리니 맥을 못 춘다. 사람들은 그를 향해 ‘왕푼수’ 혹은 ‘밥맛’이라고 수군거린다. 포장마차에서 파는 오뎅은 지저분해서 먹어본 일이 없는데다, 돼지고기는 살만 먹는 줄 알았지 껍데기까지 먹어치우는 줄 미처 몰랐던 까닭이다. 윤수일의 <아파트>를 불러야 하는 노래방에서 지그시 눈을 감고 <러브 미 텐더>를 부르는 그를 반길 이 누가 있으랴. 이상한 건 이렇게 푼수를 떠는 왕자도 여자 보는 눈은 여느 왕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 점이다. 그 역시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온갖 수모와 고초에도 절망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명랑쾌활한 ‘캔디’에게 매력을 느낀다. 씩씩하다 못해 엽기적이며, 폭력을 서슴없이 휘두르고 사투리 실력까지 겸비한 것이 요즘 신데렐라들의 트렌드다. 왕자는 오뎅을 낙타처럼 우물거리거나 자신에게 주먹질을 하는 신데렐라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평민의 집에서 열렸던 조촐한 소주 파티를 기억해내고 따뜻한 미소를 짓는다. 상류층 문화에 길들여진 왕자가 평민들의 삶에서 인생의 또 다른 진실을 발견한다! 그런 왕자가 현실에 존재할 가능성은 1%도 안 되지만, 어쨌거나 이 푼수 왕자의 행로는 흥미진진하기 짝이 없다.

지난주 MBC에서 첫 방송한 월·화드라마 <현정아 사랑해>는 재벌3세 김범수(감우성)가 “최고 경영자 수업의 일환으로 월급쟁이들의 평범한 삶을 경험하기 위해” 거리에 나갔다가, 소규모 프로덕션에서 조연출로 일하는 이현정(김민선)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다. 드라마 제작 발표회에서는 “또 신데렐라 이야기냐?”는 시큰둥한 반응 때문에 참석한 기자들과 제작팀들간에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단다. 앞서 방송된 <내사랑 팥쥐>도 신데렐라 이야기였는데, 뒤이어 방송하는 신작도 설정이 비슷하니 시선이 곱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시청률을 의식해 진부한 이야기를 재탕삼탕한다”는 비판 역시, 신데렐라 드라마의 존재만큼이나 진부하게 들린다. 신데렐라 드라마는 ‘리얼리티’와 거리가 멀지만, 그 끈질긴 생명력은 엄연히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 경영자 수업을 받는 여성들이 얼마나 될까. 여대생 수가 늘어나고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이 60%를 넘어섰다고는 하지만, ‘요직’을 두루 차지하고 1억원 이상의 연봉을 챙기는 건 아직도 남성들이다. 드라마는 판타지고, 뻔히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이 진부한 판타지를 즐기는 시청자들이 많다는 건 여성들이 처한 현실이 여전히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

오히려 눈길을 끄는 건 왕자들의 캐릭터 변화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고 ‘상류층만의 문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터라 왕자와 신데렐라의 미팅을 자연스럽게 주선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따라서 한점 흐트러짐 없는 멋스러움으로 일관하던 왕자들은 언젠가부터 조금씩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돈은 많은데 가정이 불우하다든지 경영권을 둘러싼 파워게임에서 밀려나 고난을 겪는다든지…. 인생의 쓴맛을 본 불우한 왕자들은, 현실을 씩씩하게 이겨나가는 명랑한 평민 여성을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현정아 사랑해>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다. 왕자와 신데렐라가 만나는 과정이 ‘필연적’이라고 느껴지게끔 세심한 설정을 하고, 그 둘의 만남에 ‘문화 충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면에 부각시켜 웃음의 소재로 삼았다. 상류층 생활에 길들여진 왕자가 신데렐라의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빚어내는 좌충우돌 코미디는, <현정아 사랑해>를 조금은 색다른 신데렐라 드라마로 만들어놓았다. 결국 왕자와 신데렐라는 사랑에 빠지고,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꽃피울 테지만. 이미경/ <스카이라이프> 기자 friend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