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세현이 창작과비평사 사장이 되었을 때 나는 가슴이 철렁했었다. 어이쿠야, 이젠 놀러가서 개기지 못하겠군…. ‘창비’는 나이 스물여섯에 철딱서니는 그보다 훨씬 적었던 나를 시인으로 만들어준 어른들이 있고, 그래서 어른 만나는 재미로, 혹은 어른한테 엉기는 재미로, 술을 얻어먹어도 뭔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드는 재미로 다니던 곳인데 후배가, 그것도 ‘말짱’하고 술도 잘 안 먹는, 깡마르고 얼굴 허연 안경테 사회과학도가 사장에 앉았으니 ‘든든한’ 거점이 하나 없어진 것 아닌가. 그런 큰일이 없었다. ‘치열한 백수’ 생활 덕분에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기 전까지, 그러니까 정신이 ‘말짱’해지기 전까지, 오늘은 동남방으로 가야 안주좋고 인심좋고 대접좋고, 북서 방향으로 가면 별 볼일 없다, 술 몇잔에 핀잔뿐이다, 그렇게 전파가 자동수신되는 나다.
그런데, 고세현은, 젼혀 예상 밖이었다. 기획-편집은 물론 영업까지 과학적으로 꾸려나가는 거야 원래 장기니까 혀를 차면 그만이지만, ‘접대’가 조직적일 뿐 아니라 ‘노는 끼’(정확히 말하면 남을 놀게 만드는 끼) 또한 과학적이고 조직적인데다 이따금씩 과격했던 것. 나는, 어허, 어허, 하면서 그야말로 놀랠 노자로 즐거움에 겨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대 창비’의 사장이 한국출판인회의의 무슨 ‘독서진흥’ 계통 책임을 맡았으니 무슨무슨 ‘선정’을 맡아달라고 하면서 한 묶음 보낸 책들 중에 서비스 품목으로 포함된 게 이 책인데, 또한 예상 밖이다.
한국의 출판계는 단행본파와 사전-전집파로 구분되는데 나는 전집을 좋아하지만 전집파의 대규모 무차별 방문영업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단행본 출판사를 좋아하지만 그들이 ‘문화재에 육박하는 사전’류를 내는 데 인색한 것에 늘 불만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단행본 형식으로 정리했는데도, 매우 ‘출판사전’적이다.
436쪽에 깨알 같은 글씨(나는 한국의 단행본들이 커다란 활자 크기를 갈수록 너무 남용한다고 생각한다)로, 매우 유려한 디자인을 구사하며, 출판문화계의 내로라 하는 학자-평자, 저자-번역자들이 문학 인문 사회과학 자연과학 대중문화 예술-청소년 어린이 분야로 나누어 총 1천 여권을 가려 뽑고 선정이유로 책 내용을 간단히 소개한 것을 담아낸 이 책의 정가는 불과 8천원.
2∼3년 동안의 활동을 정리했는데도 이 정도라면 10년쯤 되면 한 자료되겠다. 아니 지금부터 연감보다 훨씬 나은 미래의 사전을 지향하면 어떨까? 어쨌거나 여럿이 모여 힘을 보탠다는 게 이리 아름답고 대단하구나. ‘책과의 만남’이라는 제목이 그리 장할 수가 없다.김정환/ 시인·소설가 maydapoe@thrun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