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어를 처음 입 밖에 내본 것이 열여덟살 때다. 마드리드에서 자랐다는 늙은(이라고 해봐야 스물일곱이었지만) 대학생(물론 한국 대학생이다)한테서 <에레스 뚜>라는 노래를 배우면서였다. 스페인 출신 6인조 그룹 모세다데스의 출세작인 이 노래는 가사의 통사 구조가 치명적으로(라는 말은 별뜻이 없다. 그저 ‘매우’의 강세어일 뿐이다) 단순하다. 영어로 치면 be 동사의 직설법 현재 2인칭 단수 형태, 곧 are에 해당하는 ‘에레스’가 가사에 등장하는 유일한 동사다. 노래는 너(‘뚜’)에 대한 치명적으로 소박한 찬사를 치명적으로 밋밋한 직유에 싣고 있다. 너는 여름 아침 같다, 너는 내 두 손의 서늘한 빗물 같다, 너는 내 샘물 같다, 너는 밤의 기타 소리 같다 하는 식이다. 그러나 이 노래를 익히며 나는 한 미지의 언어에 치명적으로 매혹돼버렸고, 그래서 그 늙은 대학생으로부터 스페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교재는 <Spanish without Toil>이라는 책이었다. 그 언어를 더듬거리며 나는 고만고만한 허영심 속에서 대륙 저편의 스페인을, 대양 저편의 남아메리카를 그렸다. 스페인 땅은 그로부터 10여년 뒤에 밟아볼 수 있었지만, 남아메리카는 아직도 미지의 세계다. 그러고보니 남아메리카는 동북아시아의 대척점, 지구 행성의 표면 가운데 가장 먼 곳이다.
원제가 <남쪽 등대>인 에두아르도 미뇨나 감독의 <작별>은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자매의 성장기 얘기다. 아르헨티나와 스페인의 합작영화라는 <작별>의 무대는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를 오가지만, 두 주인공의 회상을 통해 스페인까지 거슬러오르기도 한다. <작별>의 서사 피륙은 부모와 막내동생을 앗아간 바로 그 자동차 사고로 다리를 절게 된 카르멜라의 사산(死産)하는 연애를 씨줄로 삼고, 카르멜라와 동생 아네타 사이의 때로는 끈끈하고 때로는 상크름한 자매애를 날줄로 삼는다. 배급사가 원제를 버리고 <작별>을 제목으로 취한 것은 이 자매의 영이별을 스토리의 벼리로서 특별히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영화 속에서 카르멜라는 연애의 거듭된 좌절에 치여 주초(酒草)로 몸을 학대하다가 20대를 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원제 <남쪽 등대>의 등대는 아이를 간절히 바랐던 카르멜라가 유산을 한 뒤 절망하고 있을 때 친구 앤디가 자매를 초대했던 바닷가에 있다. 그 바닷가 풍경은 영화 <작별>의 촬영기가 담아낸 가장 서늘한 장면 가운데 하나다. 등대라는 은유는, 비록 낡은 느낌이 또렷하지만, 이 영화에서 카르멜라와 아네타가 서로에게 지닌 감정을 넉넉히 감당해내고 있는 것 같다. 어린 시절의 아네타가 언니 카르멜라에게 스페인 사람처럼 말하지 말라고 응석 섞인 핀잔을 주는 장면들이 인상적이었다. 영화 속에서 10대의 카르멜라는 스페인에 살던 더 어린 시절의 말버릇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설정돼 있다. 카르멜라 역을 맡은 잉그리드 루비오는 실제로 스페인 배우라고 한다.
<작별>의 아름다운 주제가는 <저 작은 것들>이라는 제목을 지녔다. 그 작은 것들은 기억 속에 갈무리된 작은 것들이다. 여기서 ‘작은’을 ‘자질구레한’이나 ‘사소한’이나 ‘시시한’으로 바꿀 수도 있겠다. 영화 <작별>도 그런 작은 에피소드들로 이뤄져 있다. 삶을 지탱하는 것은 그런 작은 것들에 대한 기억이다, 라고 이 영화는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사랑이나 미움 같은 감정조차 <작별>에서는 자잘하다. 김우창이 오래 전에 피천득의 수필을 두고 발설한 바 ‘작은 것들의 세계’의 작은 것들이 바로 <작별>의 자잘함이고, 그 주제가인 <저 작은 것들>일 것이다. 이 작은 것들의 세계는, 김우창의 해석을 빌리면, 평범한 사람에게 주어진 삶은 근본적으로 제약 속에 있는 삶이지만 제약 속의 그 평범한 삶도 그 나름으로 보람있는 삶이어야 한다는 의식의 거처다. 그 작은 세계에 대한 사랑은 세상의 험난함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그 험한 세상을 헤쳐가기 위해 꼭 지녀야 할 강한 긍정의 의지를 표현한다. 작은 것들의 기억은 더러 사진첩 속에 있다. 카르멜라는 사진첩 속의 죽은 가족을 되풀이 그리는 아네타가 안쓰러워 그것을 감추어두었다가 아네타가 장성한 뒤에야 돌려준다. 병이 자기 몸을 갉아먹기 시작할 즈음이다. 그 사진첩은 가족사의 텍스트고, 기억의 곳집이다. 기억은 죽음을 유예시킨다. 사진을 보고도 아무도 그를 알아볼 수 없을 때에야 사람은 진짜로 죽는다고 생전의 김현은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김현은 아직 진짜로 죽지는 않은 셈이다.
유서가 돼버린 마지막 편지에서 카르멜라는 아네타에게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너라고 쓴다. 그 장면에서 나는 노래 하나를 떠올렸다. 그 노래 가사는 내 첫 스페인어 교과서였던 <Spanish without Toil>에 실려 있었다. 그때처럼 지금도 그 노래의 멜로디는 모르지만, 가사 1절은 기억하고 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이렇다. “네가 날 사랑하지 않아도/ 내겐 위안이 하나 있으니/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걸/ 네가 알고 있다는 걸/ 내가 알고 있다는 것.”고종석/ 자유기고가 aromach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