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예산의 머리(=콘텐츠)에 블록버스터의 몸통이라…. 영화는 한켠에는 나비처럼 가벼운 시구가 작가주의로 자리하고, 다른 한켠에는 태산처럼 육중한 자본이 산업으로 버티며, 양립불가능한 지형을 ‘기괴하게’ 형성한다.
관객은 세 가지 군으로 분류된다. 첫째, 싸구려 키치와 감독의 잰 체하는 악취미에 토악질이 나는 관객군. 둘째, 몇몇 장면들에서 나름대로 재미도 느꼈으나,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아리송한 관객군. 셋째, 게임이고 <금강경>이고 다 용서가 가능한데, 도대체 이 영화가 100억원짜리로서 가치가 있는지 반문하며, 제작환경 악화를 심히 우려하는 관객군.
첫 번째 관객군에 이 글은 토악질만 가중시키므로 부디 읽지 말 것을 권고드린다. 이 글의 목적은 두 번째 관객군에게 주제에 관한 해제를 제공하여 모호함을 덜고, 세 번째 관객군에 자본에 대한 이견을 제시하여 위안을 삼고자 함이다.
시적 영역의 도해 - 현실과 환상
영화는 세 가지 엔딩을 통하여 현실과 환상이 관계맺는 세 가지 방식을 보여준다.
첫 번째 “몸파는 소녀”의 엔딩은 ‘현실’이 주(主)가 되며, 환상은 부차적으로 존재하는 형태이다. 툴바의 제공없이 나타난 소녀는 매음을 한다. 유럽의 행인들인들 성냥보다 소녀의 몸이 훨씬 상품가치가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요, ‘거리의 여자’인 그녀로서도 얼어죽기보다는 그편이 훨씬 ‘대안적’이다. 다만 순수 강박에 사로잡힌 안데르센은 차라리 소녀를 얼어죽게 하여, 그녀의 시체를 우리의 무관심이 지은 죄의 징표로, 설날 아침거리에 효수(梟首)하고 싶었을 게다. 매음녀보다야 순결한 시체가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기엔 훨씬 효과적이다. 팔아야 하는 성냥으로 손을 녹이는 미봉책을 반복하며 무력하게 얼어죽되, 행복한 꿈을 꿔라. 그러나 그게 황천길이다. 꿈은 몽롱한 위안일 뿐, 주체를 장악하는 것은 냉혹한 현실이다. 환상은 도구적이고 파편적이며, 현실에 종속된다.
두 번째 ‘게임오버’ 엔딩은 환상이 현실과 대등하게 존재하는 형태이다. 툴바와 함께 ‘주’는 시스템을 인지하고 게임을 시작한다. 게임의 법칙은 순결하고 잔혹한 ‘체제 순응적 동화’를 완성하라는 것이다. 그녀는 반복해서 버림받고 죽음으로써 시스템 내부에서 살아간다. 그녀는 휑뎅그렁한 얼굴에 달뜬 목소리로, “라이터 사세요!”라는 허사만 남발하며 “준오 옵빠”를 그릴 뿐이다. 다른 이들 역시 그녀를 거짓 사랑을 꿈꾸며 얼어죽어야 하는 예정된 역할로만 취급한다. 오직 띨빡한 ‘주’만이 엉겁결에 그녀를 구한다. 깔딱깔딱 넘어가다 깨어난 그녀는 비로소 분노와 통찰을 얻는다. “꽃순이 총을 들다!” 그녀의 총구는 거리의 무관심과 ‘천사의 집’으로 표상되는 위계와 엄숙주의를 향해 불을 뿜지만, 그녀의 무차별적 폭력은 일탈일 뿐, 결코 혁명이 되지 못한다. 반항은 오히려 대중에게 소비되는 쿨한 문화상품이 된다. 망루에 선 그녀…. 가준오를 죽인 것이 누구이든 그 역시 그녀 앞에서 전사함으로써 승자가 된 게이머일 뿐이며, 그녀 손에 죽고 싶기까지 한 자는 그녀가 죽도록 미워하는 오비련이다. 그녀는 자신의 애증이 한낱 미망인 것을 깨닫고 허공에 몸을 날리지만, 공중에서 낚아채져 생포된다. 누구 맘대로 역할극을 거부해? 한편 그녀의 저항을 통해, 그녀의 가혹한 운명을 벗어나게 해주고 싶어진 ‘주’는 역할극의 체제를 부정하여 버그가 되고, 그녀와 소통하며 시스템 내부로 진입한다. 그는 시스템에 “그녀를 살려달라” 간청한다. 그러나 그녀는 게임 속 존재로서 시스템 내부에서 윤회할 뿐이다. 게임을 현실과 혼동한 그는 게임에서 지고, 지리멸렬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환상은 정교하고 체계적인 하나의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가상현실’이 되고, 현실과 대등하게 병치된다. 그러나 이는 스스로 닫힌 구조이고, 현실과 이분된 세계이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탈(가령 딱딱거리는 여자에게 기관총 난사)을 가상현실(오락실에서 총쏘기)로 내몰수록 양자의 시스템은 더욱 공고해질 뿐, 혁명은 없다.
세 번째 ‘나비를 쏘고 이기는’ 엔딩은 가상현실의 경계를 박차고 마침내 현실의 복락을 구현하는 혁명적 해피엔딩이다. 그녀를 마치 현실의 존재로 인식하고 사랑한 ‘주’와 그의 눈물로 교정에서 풀려난 소녀는 바다에 뛰어들어 나비를 쏜다. 나비는 유리가 깨어지듯 산산조각이 난다. 나비는 ‘거울’이다. 거울은 거울 속의 세계를 생성하고 두 세계를 만나게 하는 창이자, 두 세계를 가로막는 막이다. 거울을 통하여 거울 속의 나를 보게 되지만, 거울이 가로막혀 거울 속의 나와는 악수할 수 없다. 두 세계를 양립시키며, 진정한 소통없이 평행하게 운위시켜 나가는 존재! 나비는 현실세계의 모순을 가상현실로 밀어넣는 한편, 가상현실이 던지는 현실에 대한 통찰을 단지 가상의 그것으로 엄폐하고, 양자의 대립과 모순을 오직 관리된 접점에서만 소통시키며, 양자의 의도적 교란 속에서 언제나 평화롭게 하늘거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이 반동적 존재를 산산이 부수는 것만이 시스템을 부정하는 길이다. 현실은 가상현실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가상현실을 포괄한다. 가상현실 역시 현실의 연장이며, 현실의 장이 지니는 무게와 의미를 지닌다. 가면을 갈아 쓸 때마다 네 존재가 달라지냐고? 여러 가지 가면을 쓰고 싶어하는 네 존재가 있을 뿐이다. 나비가 꿈인지, 내가 꿈인지 모르겠다고, 그러고보면 뭐가 현실인지 알 수 없다고, 깐죽대는 탈정치의 혓바닥을 잡아 뽑아야 진짜/가짜 논쟁의 시스템을 전복하고, 게임에서 진정한 승리를 거둘 수 있다. 또한 이러한 형식논리를 깨는 승리는 비로소 우리를 현실의 시스템에서도 ‘혁명적으로’ 탈주하여, 환상과 현실이 이미 합일된 상태의 신비의 낙원에 도달하게끔 이끈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아마∼ 이랬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온갖 싸구려 키치로 스스로를 조롱한다. 동화가 지니는 고결한 슬픔을 ‘목포의 눈물’에 비벼 넣음으로써 기꺼이 신파로 만들고, ‘날것’을 표방하는 십대들의 대화로 ‘와꾸’를 허문다. 악한의 모습을 지지리군상으로 만들어 선악의 긴장을 늘어뜨리며, 경쾌하게 춤을 추며 총을 쏘는 ‘라라’는 액션의 살기등등함을 희석시킨다. 한편 그는 ‘라라’만큼 산만하다. 경박과 천박은 진지한 감정 몰입을 방해한다. 의도된 촌티 혹은 위악은 “풍자를 위장한 해탈”을 지향한다.
영화 외적(자본적) 영역의 고찰 - 자본의 생리
100억원이면 좋은 영화 여러 개를 만들 수 있지 않았느냐고 개탄하는 관객에게 “혹시 영화제작을 위한 공공기금이 주어져 있고, 그 예산하에 계획적인 분배를 통하여 영화를 만드는 ‘사회주의적’ 제작환경을 염두에 두고 계시지는 않느냐”고 여쭙고 싶다. 문예진흥기금이니, 영화진흥위원회라는 것이 있지만, 우리 영화의 제작은 대부분 ‘자본주의적’ 투자에 의한 것이다. 짐작건대 침체된 증권시장으로도, 중과세가 매겨질 부동산시장으로도 출구를 찾지 못한 자본은 투자할 곳을 찾다가 영화판을 기웃거리게 된 것이고, 이 영화가 가장 ‘돈이 될 듯’ 보였던 것이리라. 이 영화에 투자된 자금은 “영화를 진흥시키라고” 쾌척한 성금이 아니라, “이 영화에 투자하면 돈이 될 것 같아서” 투자된 자본이다. 만약 ‘이 영화’가 투자가치가 없어 보였다면 애초에 영화판으로 투입되지도 않았을 자본을 영화판으로 끌어들인 것인데, 그렇다면 영화계의 입장에서 <성소>는 알토란 같은 제작비를 날려먹은 괘씸한 영화가 아니라, 거액의 자본을 영화판으로 끌어들여 파이를 엄청 키워놓은 고마운 영화로 볼 수 있다. 혹자는 <성소>의 흥행 참패 이후, 투자가 경색될 것을 우려하기도 하나, 언급한 자본시장의 난맥상과 더불어 만성적인 청년실업과 주5일제 근무논의, 그리고 아직 좀더 창조적인 여가문화가 착근하지 못한 점 등은 자본으로 하여금 영화산업이 여전히 투자성을 지닌다고 전망케 할 것이다. 또 혹자는 이제 블록버스터나 실험적인 영화는 못 만들 것이라고 우려하기도 하나, 자본은 자신의 생리로 몸집을 불리게 마련이라 블록버스터의 출현은 필연이고, 장르답습적인 영화라고 해서 흥행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자본은 어느 정도 모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국영화의 미래를 위해서는 언제라도 급변할 수 있는 자본의 향배를 고민하기보다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자질향상을 고민하는 것이 더 유효하다.
그런데 100억원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이미 충무로에 뿌려졌다. 긴 제작기간 동안 상당한 고용창출을 통하여, 이미 엑스트라, 기술자들 손에 단돈 몇만원씩의 일당으로라도 쥐어졌다. 설사 체불되었다 해도, 신인에게는 입문의 기회를, 영화학도에게는 현장경험을, 스탭들에게는 큰 프로젝트의 일을 해본 경력을 주었다. 홍콩 기술스탭에게 지불된 돈 역시 유학을 가야 배울 수 있었던 액션기술을 단체로 배운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거래는 신용을 낳는다. 이 영화와 함께한 사람들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이 땅에서 또 영화를 찍을 것이다. 그리고 제작자 입장에서도 100억원대의 실험을 해보았다는 배포는 사람의 스케일을 키운다.
영화는 어쩌면 장 감독의 체취가 묻어나는 “한 무더기의 똥”이다. 그러나 많이 먹고 푸짐하게 싸는 것도 능력이고, 똥은 한편으로 밑거름이다. 빚도 재산이라는 말이 있듯 “자산=자본+부채”이다. 이 영화에서 보여준 허기와 미숙함 역시 부채의 형태로 우리의 자산을 형성한다. “매출=관객수×입장료×판권률”에서 머릿수로만 계산될 관객이 굳이 ‘100억원 회수’ 따위를 고민하지 않는다면, <성소>는 충분히 “7천원 내고, 실실 쪼개며” 볼 수 있는 영화이다. 진정으로 한국영화를 걱정하는 “열혈애국 문화시민”의 입장에서도 <성소>는 실패를 아랑곳하지 않는 감독의 쌈마이 정신이 낳은 파격적이고 신선한 종합선물세트이자, 우리 영화계의 자산으로 품을 수 있다. 관객이 왜 투자자를 걱정하는가?
그래도 아쉬운 점 - 민심이반
영화의 흥행참패는 ‘정치의 실패’로 추정된다. 투자비에 상응하는 흥행을 거두려면 ‘국민영화’를 만들기 위해 “낮은 데로 임하는” 대중적 상징화 작업이 이루어졌어야 했다. 그러나 영화의 내적 주제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와 장 감독 특유의 비정치적 발언은 헌법보다 상위법인 “국민정서법상의 괘씸죄”에 해당되어, 급속한 민심이반을 낳았다. 차라리 감독을 언론과 차단시켜 신비화시키고, 전문가에 의한 고도의 정치 마케팅을 구사했더라면…. 많은 (잠재) 관객이 가볍게 이 영화를 만나지 못한 것과, 그들에게 공분에 가까운 정서적 앙금을 남긴 것이 못내 아쉽다.황진미/ 영화 칼럼니스트 chingmee@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