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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스터와 로드 무비의 장중한 결합,<로드 투 퍼디션>(1)
2002-10-04

대부의 아들,에덴의 동쪽으로 가다

한승원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에는 살부계라고 하는 은밀한 품앗이계에 관한 이야기 나온다. 공산주의자인 아들들이 친일 행위로 축재를 한 아비를 용서하지 못하고 품앗이로 타인의 아비를 죽여주고 누대의 죄를 씻으려는 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굳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운운하지 않아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지구상 어디에서도 비슷한 숙명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 그늘에 평생 뼈를 묻을 줄 알았더니, 어느 날 뒤돌아보면 아버지라는 큰 산이 자그마한 동산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는 착시현상.

1998년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직후 샘 멘데스는 리처드 피어스와 막스 앨런 콜린스 원작의 그래픽 노블, <로드 투 퍼디션>에서 유사 이래로 반복되어온 가장 오래된 인간관계인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서 다루기로 마음먹었다. “<아메리칸 뷰티>에서 나는 아직도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주기 바랐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종교적인 색채를 띤 이채로운 장르영화를 만들고 싶었죠.” 그는 <아메리칸 뷰티>처럼 가족관계 안에 도사린 중년 남자의 구원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갱스터와 로드무비를 결합시켜 장중한 갱스터무비를 탄생시킨다. 결과적으로 <로드 투 퍼디션>은 톰 행크스, 폴 뉴먼, 주드 로의 대배우 삼인방에 삼색 장르를 칵테일한, ‘대부의 아들들이 에덴의 동쪽으로 가다’ 버전이 되었다.

죽음, 타나토스를 향하는 성장영화

1931년 일리노이주의 한 도시. 마피아처럼 한 가족의 이름으로 피의 맹세를 한 아일랜드 갱들이 있다. 대부 루니는 신이자 아버지로 도시를 지배하고, 킬러인 마이클은 그를 양아버지로 삼은 채 과묵한 가장과 죽음의 천사 역할을 수행한다. 마이클의 아들 마이클 설리반 주니어, 이름까지도 한치의 오차없이 아버지를 그대로 물려받은 소년은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아버지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진다.

대공황기의 소년 가장 이야기인 <리틀 킹>처럼 멘데스는 1930년대 대공황기를 시각적으로 충실히 번안함으로써 성장영화로서 <로드 투 퍼디션>에 독특한 컬러를 부여한다. 공황기의 궁핍함은 똑같이 신문을 읽고 똑같이 검은 옷을 입은 획일화된 군중의 이미지로 소년에게 다가온다. ‘죽음’을 알아가는 소년에게 공황이란 살인의 피비린내가 숨겨진 무의식의 연옥 같은 곳이다. 영화는 젊은 여자의 가슴만 쳐다보아도 테스토스테론이 흘러 넘치는 어린 수컷 대신 얼음이 뚝뚝 흘러내린 시신을 쳐다보며 죽음이라는 초경을 경험하는 서늘한 소년의 시선으로 입을 닫는다.

이렇듯 죽음, 타나토스의 게임은 <로드 투 퍼디션>에서 영화 전체를 통과하는 핵심주제이자 메타포. 영화에서 죽음은 곧 겨울의 이미지이며, 모든 인간관계가 얼어붙는 빙점의 계곡인 동시에 말 그대로 차가운 세상의 이치로 통한다. 아버지가 무엇을 하는지 보려 자동차 뒷좌석에 숨은 마이클은 마치 관 속에서 눈을 뜬 것처럼 보이고, 이윽고 차례로 시체가 돼버린 어머니와 어린 남동생을 목격한다. 마이클이 죽음을 훔쳐보는 행동은 갱단을 묶는 끈으로, 마이클의 가족을 먹여 살리는 비즈니스로, 아들에게는 물려주지 않으려는 원죄의 밑바탕으로, 신이 부여한 운명의 회오리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제의이며, 금기를 위반하는 것은 아버지를 극복하고 한 개체로 개별화되는 영점에 서는 행위이기도 하다. 마이클은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이 그러하듯 죽음 속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금기를 하나하나 위반하면서 어른이 되어나간다. 영화의 첫 장면, 검은 옷을 입은 한 무리의 대중과 정반대 방향으로 자전거를 타고 나가던 소년은 파이프를 훔치고, 장례식에서 주사위 게임을 하며, 결국에는 살인을 목격한다. 그렇기에 <대부>의 첫 장면이 결혼식으로 시작하듯 <로드 투 퍼디션>의 첫 장면은 장례식이다. 죽음은 한 소년을 너무 일찍 어른이 되게 만들었다.

<대부>를 넘어, 갱스터를 넘어

한편 갱스터영화로서 <로드 투 퍼디션>의 총구에는 차가운 연기가 가득하다. 여자는 여자고 남자는 남자였던 시절의 향수, 대부의 아우라를 걷어낸 영화는 갱스터 집단에 존재하는 엄연한 생존의 논리를 계속해서 확인시켜준다. 살인의 행위 안에 깃들어 있는 서정적인 비장미와 낭만성을 최대한 살린 <대부>와 달리 <로드 투 퍼디션>은 살인의 미학에 도취되지 않는다. 심지어 영화의 초반부와 후반부에 나오는 두번의 살인장면은 모두 억수 같은 빗줄기 속에서 행해지는데, 갱스터영화치고는 이상하게도 살인자나 살인을 당하는 사람이 아닌 비 자체가 주인공인 듯 보인다.

아마도 이러한 쿨한 살인의 미학을 더욱더 실감나게 재현하는 장치가 바로 주드 로가 분한 할렌 맥과이어의 등장일 것이다. 숨이 넘어가는 사람도 손수건으로 입을 막아 다시 죽이는 킬러는 마이클과 그의 아버지를 쫓아다니는 저승사자의 발걸음을 늦추지 않는다. 사진사인 동시에 킬러인 맥과이어의 행동, 즉 찍는다는 행위는 shot, 쏜다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맥과이어는 간이 음식점에서 만난 설리반에게 좋아하는 일을 해서 돈을 버니 상팔자라며 “난 시체를 좋아하죠.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을 느끼게 해주니까”라고 말한다. 맥과이어의 카메라 렌즈 안에서 거꾸로 매달린 포즈로 죽어가는 사람들은 한낱 피 흘리는 모델, 고깃덩이의 피사체로 정지해 있다. 실전으로 다가오는 단 한번의 죽음을 마치 반복해서 찍을 수 있는 연습으로 만드는 맥과이어의 렌즈는 반대로 멘데스의 절제된 연출를 통해 죽음은 장난이 아님을, 맥과이어의 말처럼 오히려 살아 있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안티테제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