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가 영상물등급위원회(위원장 김수용·73·영화감독)로부터 ‘제한상영’ 등급을 받았다. 그 다음날 기자는 영등위에 회의록의 공개를 정식으로 요청했다. 심의 과정에서 영등위의 어떤 위원이 어떤 논리를 폈는지 정확히 알고싶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6일 뒤인 지난 23일 영등위는 ‘정보공개청구에 대한 회신’이란 문서를 보내왔다. 영등위는 이 문서에서 “회의록 공개시 위원회의 공정한 업무 수행에 지장을 초래할 우려가 있어” 회의록의 전문을 공개하지는 않고 회의과정과 위원들의 발언 내용을 요약한 것만을 ‘부분 공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영등위는 자신들의 회의록에도 ‘제한열람’ 판정을 내린 셈이다. 궁금하다. 도대체 그 회의록 전문에는 또 어떤 포르노같은 발언이 나오기에 ‘제한열람’ 등급을 맞은 걸까.
영등위가 공개한 요약본은 에이포(A4) 용지 4장 분량인데, 12호쯤 되는 큰 글씨여서 내용은 소략하기 그지없다. 이걸로는 어떤 위원이 어떤 논리로 발언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다만 제한상영가에 찬성하는 발언은 이런 게 있었고 반대하는 발언은 저런 게 있었다는 식이다.
영등위는 지난 10일 위원회 회의에서 회의록 전문을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영등위 쪽 관계자는 “회의록을 공개할 경우 심의위원이 욕설·협박 전화를 받을 가능성이 있고, 또 영화 이외에 게임 등 다른 분야에서도 회의록 공개를 요구할 가능성이 있어서”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고 설명한다.
영등위의 이런 태도는 관료주의와 편의주의의 전형이다. 가령 “영화 이외에 다른 분야도 회의록 공개를 요구할 가능성이 있어서” 이번 회의록을 공개할 수 없다는 식의 논리는, 한 사람 청 들어주면 온갖 사람 청 다 들어줘야 하니 아예 원천봉쇄하자는 얘기와 같다. 이건 주객이 바뀌어도 한참 뒤바뀐 것이다.
이런 편의주의는 영등위의 일관된 태도인 듯하다. 가령 <죽어도 좋아>에 제한상영 판정을 내릴 때도 “이걸 허용하면 성기노출과 구강성교가 나오는 다른 영화도 다 18살 등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게 영등위 논리의 골자였다. 영등위는 국민에게 서비스를 하는 기관이지 국민을 교도하고 지도편달하는 기관이 아니다. 영등위원 가운데 자신이 국민에게 등급심의 ‘서비스’를 하는 머슴이라는 마음가짐이 없는 사람은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다. 영등위가 이런 편의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에 문화관광부 관료들 사이에서조차 “영등위가 공무원들보다 더 관료적”이라는 우려 섞인 발언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상수 기자 lee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