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회장에서 안내를 맡은 분이 ‘장선우라는 이름을 지우고 영화를 보라’고 주문하여 그렇게 해보려고 했는데 결국에는 그게 잘 안 된다. 장선우라는 이름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대목임이 분명하다. 성냥팔이 소녀는 총을 들고 게임 속에 재림하여 호접지몽의 사상을 몸으로 살고 열린 내러티브, 열린 결말 속으로 사라졌다. 이 어찌 장선우답지 않다 하겠는가. 이 영화는 후진 현실을 뒤엎는 시적인 아름다움을 총질한다. 아니, 최소한 ‘야, 이거 시적 아름다움 맞지?’ 하고 자기 거울에다가 되뇐다.
음악은 여전히 달파란이 맡았다. 그간 장선우 영화에서 달파란이 해낸 역할은 상당하다. ‘싸구려틱한 샘플’들을 가져다가 뭔가 세련되고 알뜰하며 정확한 방식으로 다시 엮는 특유의 ‘뽕테크노’는 <나쁜 영화> 이후의 장선우 영화에서 중요한 코드로 작용해왔다. 물론 지난 영화들과 이번 영화는 조금 다르다. 그래서 음악도 그에 걸맞게 달라진다. 지난 영화들이 일상의 진부함과 벌거벗은 인간성을 적나라한 화면에 담는 ‘산문적’인 의식의 작업이었다면 이번 영화는 그 헐벗은 절망이 장자적인 상상력과 만나 고통을 털어내는 ‘시적’인 연금술의 과정이 덧붙여져 있다. 그 과정이 영화 전체를 통해 성공했는지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음악에 관한 한 그러한 과정이 비교적 일정한 성과를 낸 것 같아 보인다.
지난번까지는 뽕짝의 두 박자 리듬을 하우스의 두 박자 리듬과 개념적으로 겹꿰매면서 줄줄이 소리들을 재단해나갔는데 이번에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있다. 물론 이박사나 남대문 시장 유의 ‘히, 히’ 하는 외침을 코러스로 쓰는 일도 여전히 마다않는다. 다시 말해 싸구려를 포용하는 시도는 여전하다. 그러나 두 박자의 리듬을 벗어나 약간은 정글이나 빅비트의 리듬 쪼개기를 떠올리게 하는 펑키한 그루브를 기본 박자로 도입하는 시도가 보인다. 또 국악이나 기타 민속음악적 리듬에서 차용한, 약간 무당기가 서린 리듬들을 도입하기도 한다. 불교음악에서 차용한 대목도 보이는데, 그건 아마도 장선우 감독의 주문을 많이 반영한 것이리라. 게다가 케미컬 브러더스 류의, 샘플된 스트링을 과감하게 기름진 테크노 리듬과 섞어돌리는 방식도 보인다. 라운지적인 데도 있고. 이번에 특히 돋보이는 건 달파란의 ‘서정성’이 추가되었다는 점. 그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 모든 음악적 재료들이 테크노적 방법을 통해 버무려진다. 사이키델릭한 키보드와 노이즈와 어울리며 때로는 B급영화의 펑키한 테마들로, 때로는 시적인 꿈들로, 싸구려 오락실의 테마로 변주된다.
달파란의 테크노는 이제 스타일화의 경지에 도달하는 듯하다. 달파란은 송곳이다. 딱 필요하다 싶은 자리에 다트놀이 하듯 리듬을 팍! 꽂아넣는다. 리듬이 복잡해졌다고 해서 너저분하게 들리진 않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특이한 대목 중 하나는 강타가 달파란의 곡에 노래를 했다는 점. 아예 강타는 거의 뮤직비디오처럼 영화의 3분 정도를 완전히 자기 코너로 만들고 있다. <나쁜 영화> 같은 영화를 만든 장선우 감독의 영화에 강타가 등장한 것은 왠지 뜻밖. 노래도, 달파란의 곡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강타스럽다. 케이블 텔레비전 같은 데에는 이 노래가 O.S.T의 타이틀 곡으로 홍보되겠지?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