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비상계엄이 선포된 겨울, 있었을 법한 이야기. 신군부의 쿠데타가 소리없이 진행되면서 성실한 군인 문영석 대위는 상부의 명령을 받는다.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라는 내용이었다. 쿠데타의 한가운데서 잠시 갈등하지만 결국 상부의 명령을 따르는 문 대위. 평범한 군인이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겪어야만 했던 이야기를 그린 것이 <메리 크리스마스>다.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2002년 HDTV 디지털영상콘텐츠 제작기술개발사업’의 지원으로 제작되는 이 작품은 25분 분량의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다. 제작진은 <목각병정>을 제작했던 한국예술종합학교 박세형 교수를 비롯한 학교 구성원. 6.25전쟁을 그린 <목각병정>의 후속편인 셈이다. 애초 제작진은 6.25전쟁과 베트남전, 신군부 쿠데타를 옴니버스 3부작으로 구상했다고. 완성은 2003년 7월이다.
<목각병정>이 동생에게 목각병정을 만들어주고 군에 입대한 미대생 영철이를 통해 6.25전쟁을 그려냈듯 <메리 크리스마스> 역시 역사 속에 묻힌 한 젊은이를 통해 신군부 쿠데타를 바라본다.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실사 다큐멘터리가 접근하기 어려운 개인의 내면을 묘사하겠다는 취지다.
불과 하룻밤 사이 제한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인 만큼, 등장인물은 많지 않다. 주인공 문영석 대위와 상관인 송 대령, 야심있는 최 대령, 간호장교, 총장, 박 소령이 고작이다. 물론 배후 조종자인 보안사령관도 등장한다. <메리 크리스마스>는 당시 미군 개입의 우려와 군 세력의 대립을 긴박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보안사령관이 총상을 입는다는 가상의 설정도 구상했다.
그러나 딱딱한 역사 기록이 아닌 만큼 우선 순위는 주인공의 내면묘사다. 현실과 환상이 자연스럽게 교차하는 연출은 특히 기대되는 부분. 문 대위의 환상 속에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은 죽은 여동생이다. 총장 공관에 침입해 부관에게 총을 겨눌 때, 권총을 들고 보안사령부로 뛰어들 때, 세월을 넘어 여동생이 나타난다.
50년대 미군 부대 앞에서 과자를 주우려고 애쓰는 오누이. 그러나 아수라장 속에서 연약한 오누이에게 돌아올 과자는 없다. 겨우 초콜릿을 얻은 문 대위가 여동생에게 돌아서지만, 주위는 텅 빈 어둠뿐이다.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버리고 상부의 지시에 복종해야 하는 인간 늑대의 이야기를 그린 오키우라 히로유키의 <인랑>과 언뜻 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짐작했겠지만 <메리 크리스마스>는 반어적인 제목이다. 상부의 명령에 복종했지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배신뿐이었던 젊은이로서는 쿠데타 성공을 축하하는 들뜬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합류할 수 없었다. 하물며 자신을 조사하러 온 미군이 건넨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에 답할 수 있었으랴.
<메리 크리스마스>는 특별한 역사관을 강요하거나 설명하려 하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당시 있었을 법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그런데 그저 ‘지어낸 이야기’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퍽 많은 것이 마음에 남는다.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한낱 먼지에 불과한 개인의 운명이 슬퍼서, 라는 것은 너무 상투적이다.
그저 소중한 존재를 보호하고 싶었을 뿐인데, 굶지 않으려고 발버둥쳤을 뿐인데,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어쩔 수 없이 맞게 되는 상황. 비록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있지는 않지만 그 상황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떠올리니,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중한 가족을 지켜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섬뜩하다.김일림/ 월간 <뉴타입> 기자 illim@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