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스의 친구 줄스 또한 축구를 좋아하는 소녀인데 줄스의 부모는 백인 영국사회의 속물스러운 측면을 대표한다. 줄스의 엄마는 영국식 세련미와 우아함을 추구하는 여성이다. 외동딸 줄스가 축구공을 차는 것에는 당연히 반대지만, 그렇다고 유색인종 제스가 자기 집을 드나드는 것에 대놓고 싫은 기색은 내비치지 않을 만큼의 상식과 교양은 갖췄다. 그런데 줄스가 제스와 레즈비언 관계가 아닐까 의심하게 되면서 그녀의 교양과 참을성이 위협받는다. 한바탕 소동을 치른 뒤에 오해가 풀리고 나자 그녀는 행복한 얼굴로 말한다. “오우, 물론 나는 레즈비언 관계를 인정해.”
<슈팅 라이크 베컴>은 동성애를 정면으로 문제화한 영화는 아니지만 레즈비어니즘뿐만 아니라 베컴에게 사랑을 느끼는 인도 청년에 대한 우호적인 시선을 통해 동성애에 대해 자유주의적인 입장을 취한다. 뿐만 아니라 제스와 줄스의 경쟁과 우정 관계 속에서 여성간의 자매애적 연대의 문제도 놓치지 않았다.
축구 이야기를 통해 이처럼 현대 영국사회를 직조하고 있는 다양한 문화적 이슈들을 풀어내는 거린다 차다 감독은 예상대로 인도 출신의 영국인 여성감독이다. <슈팅 라이크 베컴>을 통해서 보건대 그는 인도의 정신을 강박적으로 고수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그렇다고 모던한 영국사회에 냉큼 투항한 사람도 아니다. 또한 축구공을 무기 삼아 백인 마초들의 심장에 비수를 날리겠다는 페미니스트 전사 같지도 않다.
그는 다만 인도인이자 영국인이고 여성이라는 자신의 복잡한 정체성을 또 하나의 개성적인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유희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당탕탕 갈등과 소란이 벌어져야 마땅한 스토리 라인에도 불구하고 영화 자체는 가볍고 상쾌하다는 점, 영화의 마지막에 자막이 올라갈 때 언뜻 느껴지는 촬영현장의 즐거운 분위기 같은 것들이 그 증거다.
반복되는 고정관념들, 그러나 ‘좋은’ 영화
물론 이로 인한 약점들이 없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절대로 웃고 넘길 수 없는, 혹은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좌절하고 말 것 같은 거대한 갈등들을 수없이 나열하면서도 마치 사람들이 착하기만 하면 모두 해결될 거라는 낙관으로 몰고 간다. 이것은 브루스 윌리스나 해리슨 포드가 적들로부터 총을 한방도 맞지 않은 채 기지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과 같다. 냉정하게 말해서 한편의 잘 짜인 시트콤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가 하나의 커다란 고정관념을 반복한다. 제스와 줄스의 가정에서 엄마들은 아빠들보다 훨씬 더 관습적인 사고방식에 고착되어 있고 상황에 신경질적으로 대처할 뿐만 아니라 이웃의 평판에 전전긍긍한다. 반면 아빠들은 문제를 좀더 침착하게 직시하면서 사태를 풀어나가는 중심에 놓인다. 이를테면 큰딸의 결혼식과 작은딸의 축구 결승전이 절정으로 치닫는 장면을 교차편집해서 보여준 다음 제스의 아버지가 “오늘은 내 두딸 모두에게 인생 최고의 날이구나”라고 대사를 치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감정적인 절정인 동시에 상투성의 종합이기도 하다.
또한 <슈팅 라이크 베컴>은 이런 식의 문제를 다룰 때 단골로 등장하는 이슈 하나를 의도적으로 빠뜨렸다. 바로 계층간의 갈등문제다. 이민자들은 현지사회의 주류에 편입하기 어렵기 때문에 교육과 경제력 면에서 소외 계층을 이룬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제스네 가정은 성공적으로 뿌리내린 중산층 가정으로 묘사된다. 아마도 거린다 차다 감독 자신이 고등교육을 받은 중산층 이민자 출신이 아닌가 짐작해 볼 수 있겠다. 다만 모든 이민자들은 가난과 편견에 시달릴 거라는 생각 자체가 하나의 고정관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도 이 영화의 역설적인 공로인데, 이는 한국영화 <가족 시네마>(1998, 박철수)에서도 이미 감지되던 측면이다.
<슈팅 라이크 베컴>은 사랑스럽고 좋은 영화다. 일단 어떤 한 가지 이슈를 코밑에 들이밀면서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신은 양식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부담이 없다. 그러면서도 잘 훈련된 시선과 유머 감각을 가지고 오늘날 이 지구촌에 필요한 것이 문화적 다양성과 관용이라는 점을 성공적으로 설득한다. 인도와 영국이 만나는 접합 지대에서 여성이라는 소수자의 시선으로 상황을 정직하게 바라본 거린다 차다 감독은 흔히 말하는 ‘사이 공간’(in-between space)의 힘이 상업적인 잠재력까지 지니고 있음을 입증했다.김소희/ 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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