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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티 뉴스> 제작, 그리고 3D 입체영화 조감독으로 일하기까지
2002-09-19

한국인의 눈으로 본 전후 조국

50년 미국 공보원 영화부에서 내가 맡은 일은, 미국에서 제작된 홍보영화를 번역하는 거였어. 순전히 영어 실력이 요구되는 일이었기에 나에게 주어진 거지. 다큐멘터리를 처음으로 접하는 순간이었어. 정작 나에게 영화의 길을 열어준 건 미군이 된 셈이야. 그뒤 53년 국제연합한국재건단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영화제작의 길로 들어서게 돼. 운크라(UNKRA)라고 하는 한국재건단은 50년 12월 제5차 국제연합 총회의 결의에 따라 6·25전쟁으로 파괴된 한국의 부흥과 재건을 돕기 위해 설립했던 기구였어. 국제연합 회원국들의 갹출금으로 식량 원조도 하고 산업, 교통, 통신, 의료, 교육시설을 복구하는 게 주요 임무였지. 53년 7천만달러의 기금으로 부흥사업에 착수한 이래, 60년까지 계획된 물자를 원조했는데, 그 실적은 1억2208만4천달러에 달했어.

이 기구의 원조로 건립된 주요 시설로는 인천판유리공장·문경시멘트공장·국립의료원 등이 있었지. 그런 운크라에선 전쟁 직후 한국의 실태를 알리는 다큐와 미군의 이미지를 고양시키는 홍보영화 제작에도 관여했어. 특히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방영되던 <대한뉴스>를 대신해 <리버티뉴스>를 찍기도 했어. 뉴스나 다큐멘터리를 번역하는 일뿐만 아니라, 그들을 따라다니며, 현장의 인력들을 대신 지휘하고, 기술자들에게 카메라, 조명기계 등의 매뉴얼을 번역해주기도 했어. 그러다가 차츰 스크립트도 맡게 되고, 카메라도 만지게 됐지. 일종의 어깨 너머 배운 지식들이야. 뉴스나 다큐멘터리는 극영화처럼 많은 인력이 분담해서 만드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노력하에 생산됐어. 혼자서 극본을 쓰고, 카메라를 잡는 시스템이었지. 그래서 제작 전반의 지식을 얻는 것이 수월했어. 이곳 저곳을 기웃대며 얻을 필요가 없었던 거지.

그렇게 기록영화로 나 자신을 이끈 건 다름 아닌 전쟁이었어. 전쟁 직후의 한국은 다큐멘터리 감독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흥미로운 장소였어. 다큐란 사회의 거울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나 역시 외국의 시각이 아닌 한국인의 눈으로 조국의 폐해를 알리고 싶었어. 내 손으로 직접 카메라를 든 건 미국의 (Columbia Broadcasting System)와 (National Broadcasting Co.)에서 각각 텔레비전 특파원으로 뉴스와 기록영화를 만들면서부터였어. 전쟁다큐를 찍어 뉴스거리로 제공한 것은 나중에 <대한뉴스> 재개의 시초가 되지. 55년 한국 공보처에 둥지를 튼 나는 <코리안 퍼스펙티브>와 <낙원제주> 등의 홍보영화 제작과 함께 <대한뉴스>를 주관하게 돼. <대한뉴스>와 같은 뉴스영화란 보통 1주일에 1회, 상영시간 10분 이내로 편집·제작된 것으로 정기적으로 영화관 프로로 상영됐어. 텔레비전 수상기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의 뉴스영화라 지금은 옛 추억의 대명사가 되버린 <대한뉴스>는 극장에 간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청해야 했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지만, 94년 말까지 <대한뉴스>는 한국의 대표적 뉴스영화로 살아남았어. 한국의 전망을 담은 <코리안 퍼스펙티브>와 제주도의 명승지를 한눈에 담은 <낙원제주>는 둘 다 총천연색 코닥필름으로 시도된 거였어. 한국영화로선 최초의 컬러 영상이었지.

코닥필름의 경우, 종전 뒤 구하기 어려운 힘든 물품 중 하나였는데, 다행히 근무하던 곳에서 미군을 통해 정식 절차를 밟아 수입할 수 있었어. 두 영화 모두 필름을 찾지 못해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 미국에서 <코리안 퍼스펙티브> 비디오 테이프를 발견해서 영상원에 보관 중이야. 공보처에서 일하던 어느 날 나에게 또 한번의 행운이 찾아와. 미국 파라마운트영화사에서 <휴전>(Cease Fire)이라는 3D 입체영화를 만드는데, 조감독으로 발탁된 거야.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영화제작에 관한 지식을 갖춘 사람을 물색하던 중 내가 적격이라는 판단을 내린 거지. <휴전>의 감독은 오언 클램프라는 사람이었어. 내게는 미국영화 신기술과 더불어, 극영화 제작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어. 현장에서 틈이 날 때마다, 스탭들과 대화하며 새로운 기술을 전수받았고, 기계를 다루는 것도 점점 익숙해질 무렵 영화가 끝났어. 장비를 철수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오언 감독에게서 편지 한통이 날아왔어. “Dear Mr. Lee”라고 시작하는 그의 편지엔 한국에서 영화촬영을 하는 동안 현장의 인력 지휘와 명령의 전달, 그리고 스탭간의 훌륭한 조직력을 이끌어낸 나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었어.

구술 이형표/ 1922년생구술 50년대 미국공보원(USIS)과 국제연합한국재건단에서 군 홍보 및 기록영화 제작구술 미국 <NBC> <CBS> 특파원으로 활약하면서 뉴스 제작구술 60년대부터 극영화 86편 작업구술 <서울의 지붕밑> <말띠 여대생> <애하> <너의 이름은 여자> 등구술 80년대 중반 독립기념관을 비롯한 각종 전시관 기획, 설계, 시공 총괄구술 현재 등급위와 진흥위원회에서 활동 중정리 심지현 simssisi@dreamx.net / 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