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형태의 반독재민주화운동이 60년 4·19 이래 유장한 절정에 달했던 70∼80년대, 그리고 1950년 6·25 이래 지하로 스며들었던 좌파민중운동이 백주대낮으로 등장하자마자 소비에트 몰락을 배경으로 고스란히 빛바래며 모멸을 감수하던 80∼90년대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수난의 격변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왜냐면, 수난의 영웅들은 많지만, (정치적) 전망의 영웅들은 없거나,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수난의 영웅은, 예수가 그렇듯, (고급) 종교에 달하지만 종교는 정치적 전망과 상극이다. 자본주의와 기독교의 결합은 전망의 결합이라기보다는 생존의 야합이다. 종교의 성(聖)은, 종교지도자들의 신년 덕담에서 누누이 보듯, 정치적으로 너무 지당해서 하나마나 할 뿐 아니라 ‘지당함’에 아우라를 씌우므로 백해무익하다. 김대중 정권의 무능은 크게 보아 수난 영웅의 무능에 다름 아니다.
문부식은 하느님을 믿는 신학대 학생으로 80년 전두환 신군부의 광주대학살을 암묵리에 승인한 미국에 분노, 82년 부산 미문화원에 방화했고, 이 사건에서 한명이 불에 타죽었다. 민주화운동권은 그를 반미투쟁의 선봉으로 영웅화했으나 그 자신은 ‘무고한 희생자’에 대한 죄의식에 시달렸다. 다시 말하면, 그의 하느님은 그에게 안팎으로 수난을 이중화했다. 그리고 그 중첩은, 문학쪽으로 제 몸을 열며(그는 치열한 시인이다) 그가 ‘수난의 격변’을 극복하는, 전망없는 ‘정치=신화화’ 시대를 극복하는 진정한 사유의 지식인으로 탄생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위 책은 그의 ‘생애=글’이 80∼90년대의 가장 깊숙한 곳을 흐르며 전망의 궤적을 남기는 과정이자 현장이다. 그의 ‘글=생애’로 인해 우리는 비로소 ‘당파성’, ‘지식인’의 참뜻을 최소한 복원할 수 있다.
“명백히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되는 죄를 숨기고, 아니 죄를 죄로 인식하는 기본적인 양심의 자질조차 내던져버린 이 시대에 파울 첼란과 그의 시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루마니아 시인 파울 첼란은 ‘브레히트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나무 없는 나뭇잎 하나>라는 시에서 이렇게 묻는다. ‘어떤 이야기가/ 그것이/ 너무 많이 이야기된 것이므로/ 거의 일종의 죄악이라면/ 그것은 어떤 시대인가?’ 침묵과 내용없는 껍데기뿐인 수다가 공존하는 시대. 그리하여 지나간 과거에 새로운 폭력을 가하는 이 시대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가? 이미 눈치챘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이야기한 주제는 실은 너무 많이 이야기된 기억들이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은?”(‘5장 누구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죽음과 희생에 대한 예의’ 중)김정환/ 시인·소설가 maydapoe@thrun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