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성사(心性史)라는 것이 역사학의 한 분과나 방법론으로서 버젓한 걸 보면, 특정한 시대에 대응하는 사람의 심성이라는 게 정말 있는지도 모른다.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이라는 책이 흥미진진하게 기술하고 있는 에피소드들을 믿자면, 대혁명 이전에 살았던 프랑스인들의 심성은 지금 사람들과 크게 달랐던 모양이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연애 감정의 무늬도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다. 중세의 연애는, 중세를 살아보지 않았으니 그 시기의 문학 작품들로 미뤄 짐작하자면, 근대 이후의, 라고 말하는 것도 근대 이후의 모든 연애를 탐색해보아서가 아니라 이 시대의 문학 작품들로 미뤄 짐작하는 것이지만, 연애보다 훨씬 격렬했던 것 같다.
나는 지금 섹스의 격렬함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섹스가 묘사되지 않은 작품들에서도 수백년 전의 사랑은 격렬하다. 예컨대 스페인의 전설적 영웅 엘시드의 무용(武勇)과 사랑을 그린 코르네유의 비극 <르시드>나 단 하룻밤의 동침과 죽음으로 기구한 사랑을 완성하는 이탈리아 틴에이저 커플의 얘기인 셰익스피어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주인공들의 정열은 섹스를 물 마시듯 소비하는 요즘 연애 소설 주인공들의 정열보다 한결 격렬하다. 비록 현대 소설이기는 하지만 중세를 배경으로 한 <장미의 이름>에서도, 스쳐 지나가는 에피소드처럼 감질나게 박혀 있는 아드소와 하층민 소녀의 짧은 사랑은 그 덧없음을 상쇄하려는 듯 막무가내로 격렬하다. 그 격렬함이 불길하게 예시하는 파탄 때문에, 이 사랑들은 비련(悲戀)이라는 말에 값한다. 현대 소설에서 이런 비련을 찾기는 덜 쉬워 보인다.
<연애소설>이라는 영화를 보고 든 생각인데, 현대적 사랑의 이런 물렁물렁함은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한 죽음으로는 양이 안 찼던 듯 <연애소설>은 두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지만, 이 영화를 이끄는 주인공들의 연애 감정이 중세인(中世人)들의 그것만큼 격렬해 보이지는 않는다. 세 주인공 가운데 두 사람의 때이른 죽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연애에 비련의 냄새가 옅어 보이는 것은, 그들의 감정이 이렇듯 덜 격렬해 보여서일 것이다. 요컨대 때이른 죽음만으로는 비련을 완성할 수 없다. 비련은 감정의 격렬함을 전제한다. <연애소설>의 연애는 현대적 연애, '쿨'한 연애다.
그렇더라도, 비련이든 아니든, 그럴듯한 연애는 젊은 죽음으로 마무리되게 마련이다. 내가 처음으로 엿본 젊은 죽음은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러브스토리>(그러고보니 이게 우리말로는 ‘연애 소설’이군)의 여주인공 제니퍼의 죽음이 그 다음이었을 것이다. <연애소설>은 도입부에서부터 수인(의 실제 이름은 경희다)의 죽음을 예고한다. 수인이 경희(의 실제 이름은 수인이다)에게 (너무 커져서) 자기가 못 입게 된 옷을 주며 “하는 일도 없는데 계속 살이 빠진다”고 털어놓는 것이다.
애정물에서 주인공들을 죽음으로 모는, 또는 그렇지 않더라도 괴롭히는 병들은 대체로 귀족적이다. 여기서 귀족적이라는 것은 치명적이되 너절하다는 느낌이 덜하다는 뜻이다. <러브스토리>의 백혈병이 고전적 예다. <러브스토리>가 발표된 1960년대 말 이후, 멜로물 속 젊은 연인들의 한쪽은 대개 백혈병이나 그와 비슷한 병으로 죽어갔다. 그 이전에 결핵이 난치병에 속하던 시절에는 결핵이 그 자리를 차지했었던 것 같다. 드물기는 하지만, <무기여 잘 있거라>의 캐서린 버클리처럼 산고(産苦)로 죽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들 순애보의 주인공이 매독이나 치질이나 방광염으로 고생하는 법은 결코 없다. <연애소설>에서 두 여주인공이 무슨 병으로 죽는지는 확실치 않다. 수인의 경우, 투석을 하는 것으로 보아 신장 계통의 병을 앓았던 듯하다. 만성신부전이었을까? 그것만 해도 상투에서는 꽤 벗어난 셈이다.
수인과 경희 사이의 감정을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애정? 연대감? 동류의식? 하기야 애정과 연대감이나 동류의식이 늘 또렷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이름 바꿔 부르기에서 나는 전혜린을 떠올렸다. 전혜린이 친구와 서로 이름을 바꿔 부른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전혜린의 수필에 따르면, 그는 고등학교 시절 가까운 급우와 매일 일기를 바꿔 보았던 모양이다. 남에게, 그가 아무리 가까운 벗일지라도, 읽히게 될 일기를 쓸 때 자기 검열이 전혀 작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전혜린과 그의 친구는 매우 특이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이 그 시대의 심성을 반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젊은 사랑은 아름답다. 그것이 부자연스러운 사랑일 때조차 그렇다. 젊다는 것 자체가 이미 아름다운데, 그들이 사랑까지 한다면 더 말해 무엇하랴? 미지의 인물에게서 오는 우편물이나 이름을 둘러싼 혼란을 에피소드에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이와이 순지 감독의 <러브레터>를 연상시키는 <연애소설>이 특별히 인상적인 영화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영화가 샐긋샐긋 그려내고 있는 젊은 사랑은, 모든 젊은 사랑이 그렇듯, 아름다웠다. 고종석/ 자유기고가 aromach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