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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토 말테제>의 한국어판 발간
2002-09-12

20세기 율리시즈

나는 여기에 감히 ‘20세기 그 자체’라는 말을 붙이고 싶다. 영원한 세계인 코르토 말테제가 앞의 반세기를 살았고, 불멸의 만화가 휴고 플라트가 뒤의 반세기 동안 그를 그려나갔다. 인류사의 가장 격동적인 한 시대, 지표면의 모든 곳을 표류하며 자신의 꿈을 쫓아간 한 남자의 일대기 <코르토 말테제>는 이미 세계인이 헌사한 숭배의 꽃으로 뒤덮여 있다. 그러나 그것은 헌화로 뒤덮인 기념비가 아니라, 지금도 알 수 없는 바다를 떠돌며 새로운 전설을 만들고 있는 신비의 선박이다. 그가 왔다. 코르토가 기나긴 길을 돌아 우리에게 왔다.

만화가인 휴고 플라트는 그 스스로 코르토 말테제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1927년 프랑스-영국계 군인 아버지와 유대-스페인-터키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베니스와 에티오피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온갖 민족의 신화와 민담, 그리고 파시즘과 자유주의의 사상을 섭렵했다. 18살 때부터 이탈리아에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곧 라틴아메리카로 건너가 그곳에서 모험과 창작을 거듭했다. 그리고 1962년 이탈리아로 돌아와 <커크 상사>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1967년 <염해의 발라드>를 시작으로 전설의 영웅 ‘코르토 말테제’의 이야기에 불을 밝혔다. 휴고 플라트는 1995년 눈을 감을 때까지 50년간 1만 페이지에 달하는 작품을 그려냈는데, 역시 이탈리아의 일급 만화가인 밀로 마나라가 그림을 그리고 자신이 글을 쓴 <인디언 썸머> 등 다양한 창작의 영역에 발을 뻗기도 했다.

코스모폴리탄 영웅, 길을 떠나다

풍부한 고고학적 신화적 지식, 탁월한 위기 대처능력, 용맹한 모험심과 마음 깊은 선의를 가진 코르토 말테제는 영원한 코스모폴리탄 영웅의 상징으로 <인디아나 존스> <마스터 키튼> 그리고 <툼레이더>의 라라 크로프트 등을 그의 그림자 아래 두고 있다. 코르토는 1887년 영국인 수병인 아버지와 세비야의 집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세계 각국을 떠돌며 기묘한 사건들을 체험하게 된다. 그의 이야기는 <염해의 발라드>에서부터 <무>(Mu)에 이르기까지 12권의 앨범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번에 국내에서는 북하우스를 통해 처음 <베네치아의 전설> <사마르칸트의 황금 궁전>, 연이어 <시베리아 횡단열차> <켈트 이야기> <에티오피아 대장정> 등 모두 5권을 선보일 예정이다. 코르토 말테제의 모험이 집약된 1917년에서부터 1922년의 기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러시아혁명과 1차 세계대전 등의 역사적 파랑이 환상과 신비의 보물을 꿈꾸는 코르토의 여행과 교묘하게 겹쳐지는 지점으로, 현실과 판타지를 넘나드는 특유의 세계를 체험하기에 가장 좋은 책들로 여겨진다.

말쑥한 해군 제복에 담배 연기를 휘날리는 코르토의 모습은 한번 보기만 해도 바다와 방랑의 냄새를 느끼게 된다. 그의 캐릭터야말로 이 만화의 대부분을 전해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관계를 풍성하게 이해하는 데서 코르토의 존재는 더욱 분명하게 떠오른다. 코르토가 우정을 바치기에 주저함이 없는 러시아인 도둑 라스푸친은 정말로 흥미로운 인물이다. 자신의 욕망을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고, 언제나 기회만 오면 한몫 잡으려고 하며, 자기와 같은 감방의 죄수가 자살을 해도 눈도 끔뻑하지 않는 냉정함은 코르토에게는 없는 강한 이기성의 냄새를 풍겨낸다. 거기에 코르토의 여성 편력만 빼앗았더라면 <그리스인 조르바>와 어깨를 견줄 수 있었을 정도의 매력을 보여준다. 코르토의 많은 여행은 여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더욱 기묘한 세계로 빠져드는데, 이번에 먼저 나온 두권의 책은 그 여자들에 대한 짧은 추억들만 나온다는 점이 조금 아쉽다(프랑스의 카스트만출판사는 1994년 <코르토 말테제의 여인들>이라는 특별본을 출간한 바 있다). 그리고 국내 발간본 전체가 흑백으로만 구성되어 있고 표지조차 원작의 것을 가져오지 않아, 휴고 플라트 특유의 황홀한 수채의 빛깔을 만날 수 없다는 것도 무척 아쉽다.

모험과 여행의 안내서

코르토는 진정한 여행과 모험의 대리자, 유럽 지식인들의 머릿속에 있는 순결한 이상과도 같은 존재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 허공 속에, 책 속에 존재하는 판타지만은 아니다. 코르토가 찾아가는 섬, 목숨을 걸고 뛰어내리는 다리, 그를 몽롱하게 만드는 이국의 춤, 보물의 단서가 되는 기이한 글자들…. 이것들은 분명히 우리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다. 휴고 플라트는 꼼꼼한 체험과 조사로 우리가 코르토의 눈을 통해 그 세계를 여행하는 데 조금의 부족함이 없게 만들어준다. 거기에 잭 런던, 존 리드와 같은 실존의 인물들과의 만남까지 엮여져 더욱 풍성한 현실감 속의 여행을 가능하게 해준다. 여행과 다큐멘터리 잡지로 널리 알려진 <지오>(Geo)의 프랑스어판은 지난해 가을 <코르토 말테제>만을 테마로 한 특별호를 발간하기도 했다. <지오>의 사진가와 기자들은 만화 속에서 코르토가 다녀간 장소들을 일일이 방문하여 실재와 만화를 비교하고, 만화 속에 주요한 소재로 등장하는 여러 부족의 기이한 문화, 여러 상징의 문장들을 자세히 소개해주고 있다. 코르토를 읽고 그의 세계로 떠나는 자들은 어쩌면 가장 훌륭한 여행의 안내서를 마음에 품고 떠나는 행운아들이 아닐까?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 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