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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약한 영웅,아버지 <로드 투 퍼디션>
2002-09-09

■ Story

1930년대 공황기, 금주령이 내려져 있는 미국. 소년은 아버지의 직업이 궁금해진다. 아버지 마이클 설리반은 시카고의 아일랜드계 갱단에 소속되어 있는 하수인이다. 호기심이 발동한 아들은 몰래 아버지의 차에 숨어 따라갔다가 살인이 벌어지는 장면을 목격한다. 살인을 저지른 갱단 두목의 아들 코너는 이 사실이 알려질지 모른다는 불안함에 마이클의 가족을 살해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제 쫓기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그들은 가족의 복수를 다짐한다.

■ Review

이제는 어른이 되어버렸을 소년의 플래시백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총과 결투, 또는 전투가 구심적인 역할을 하는 액션-이미지의 영화들에서 이런 방식의 도입부는 종종 사라져간 인물들을 영웅으로 기억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 플래시백의 화자가 꼬마이거나 관찰자일 때, 그들은 커서, 또는 남아서, 무용담 속으로 스러져간 인물들을 회자해야 할 역할을 맡는다. <아메리칸 뷰티>의 현재를 떠나, 갱스터리즘의 세계로 들어간 샘 멘데스의 <로드 투 퍼디션>에서 화자로서의 꼬마는 아들이며, 잊혀져간 영웅은 아버지이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는 이 영화를 둘러싸고 있는 사건의 모든 출발지점이며, 또한 결말지점이다. 아버지 루니는 친아들 코너의 잘못을 덮기 위해 마이클과 그의 아들을 죽여야만 하고, 아버지 마이클은 아들을 지키기 위해 루니와 코너 부자를 죽여야만 한다. 루니가 코너를 향해 신이 잘못내린 인간이라고 한탄한다고 해서, 또 마이클이 그와 너무나 닮아 오히려 아들에게 거리를 둔다고 해서, 그 아버지들이 맡고 있는 혈연의 의무감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말종 코너도, 철없는 아들 마이클 주니어도 모두 그 아버지들을 곤경에 빠뜨리지만, 끝내 그 복수극은 아버지들의 죽음으로써만 정화된다.

가족사의 파경을 미국의 단면으로서 보여주고자 했던 <아메리칸 뷰티>의 아버지들은 모두 정신적인 불구자였다. 무기력증을 탈피하기 위한 구실로 딸의 친구에게 성적인 호기심을 보이는 아버지와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인정하지 못하고 마초의 흉내를 내는 이웃집 아버지. 가족사적인 ‘공황’에 빠져버린 이 두 이웃집간에 나머지 가족의 내러티브가 얽혀 있지만, 행위의 결말을 지어내는 것은 결국 이 두 허약한 가장에 의해서이다. 그들은 죽고, 죽인다. 그러므로 <아메리칸 뷰티>에서 <로드 투 퍼디션>으로 이어지는 셈 멘데스의 시선은 곧 아버지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 아들의 호기심은 아버지를 곤경에 빠뜨리고, 아들을 보호하기 위한 아버지의 도주가 시작된다.♣ 루니는 지역사회의 권력을 한손에 쥐고 있는 갱단의 두목. 고아인 아버지 마이클 설리반을 보살펴준 후견자 같은 그는 마이클 주이어에게는 할아버지뻘이다. ♣ 그러나 친아들의 잘못을 덮기위해, `유사 아들`인 마이클과의 유대는 파경을 맞게된다.

그런데, 샘 멘데스는 그런 아버지들을 권력의 담지자로서 이해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아버지의 법’이 주관하고 있는 것으로 쉽게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이 영화의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끈끈한 관계를 이론적 개념으로 설명해내고 비판할 수 있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 이론이 끌어당기는 유혹을 피해 진짜 형상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인 것 같다). 샘 멘데스는 아버지의 자리를 상징적으로 해부하지 않는다. 그들을 바라보는 샘 멘데스의 시선은 정동의 논리로 가득 차 있다. 샘 멘데스는 무언가에 덜미를 잡혀 허덕이고 있는 그들을 연민의 대상으로 표현해내려고 한다. 그 연민의 시선 속에 들어 있는 우울한 조소가 <아메리칸 뷰티>의 막다른 길이라면, 그들의 불능적 권위에 대한 쓸쓸한 당위성이 배어 있는 것이 <로드 투 퍼디션>일 것이다.

그러므로 샘 멘데스가 <로드 투 퍼디션>에서 주의깊게 형상화하려는 것은 엄한 얼굴을 한 채로 권력의 힘을 발휘하는 아버지의 표정이 아니라, 뒤돌아선 그들의 뒷모습에 걸려 있는 숨길 수 없는 허약함이다. 아버지의 정면에 끌리기보다, 뒷모습에 끌린다는 말은 단지 수사적인 의미에서 풀이될 수만은 없다.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위험은 무너지기 쉬운 그 등 뒤에서 다가온다. 빗속에서 루니는 뒤돌아선 채로 마이클의 총탄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마이클은 파도소리가 들리는 날 화창한 바닷가를 바라보다가 뒤에서 다가온 맥과이어에 의해 쓰러진다. 샘 멘데스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통해 미국의 뒷모습을 투사하려 한 것은 아닐까? 그렇게도 허술한 아메리칸 드림의 뒷모습. 갑작스럽게 진로를 바꿔 갱스터 장르에 매혹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희망이 생기려는 순간 불행이 들이닥치는 도돌이표의 인식은 여전히 남아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가족이 보여주는 미국의 감춰진 뒷모습과 미국의 강건한 역사가 감추고 있는 과거의 뒷모습은 시대를 달리해도 변함이 없는 것이다. 달리 생각하여 갱스터의 역사는 미국 개척의 한 부정적 역사이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아들의 기억이 상기시키는 아버지의 모습이란 또 얼마나 약한 영웅의 행색인가.

♣ 영화는 아버지와 함께 길에서 보낸 한 계절을 회상하는 소년의 플래시백으로 문을 열고 닫는다.♣ 평화롭던 가족이 루니의 손에 희생되자 마이클 부자는 복수를 계획하고, 시체만 골라 찍는 희한한 사진가 맥과이어가 이들의 뒤를 쫓는다.

형식에 초점을 놓고 볼 때 <아메리칸 뷰티>와 <로드 투 퍼디션>의 차이는 감정을 다스리는 영화적 방식에 대한 사고이다. <아메리칸 뷰티>가 캐릭터의 성격과 극적 긴장감으로 탄탄하게 직조되어 있는 영화라면, <로드 투 퍼디션>은 연극적 힘을 벗어나, 좀더 영화적인 이미지들의 표현으로 변화해 있다. 예를 들어, 이 영화는 액션-이미지의 주인공들에게 정동의 논리를 덧입히기 위해 그들의 액션이 어떤 방식으로, 또는 어떤 형상으로 벌어져야 할지를 고민한 흔적을 보여준다. 두드러지는 두개의 장면, 즉 마이클이 루니를 죽이는 장면과 마이클이 맥과이어에게 죽는 장면은 청각의 이미지와 시각의 이미지를 서로 충돌시키면서 정동의 액션을 펼쳐놓는다.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고, 카메라는 하나둘씩 쓰러지는 인물들을 잡으며 옆으로 흐르지만, 정작 비장한 음악소리에 막혀 총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음악이 감정을 실어 나른다. 또는 화창한 날 실내에서 벌어지는 마이클의 죽음은 끊임없이 들려오는 파도소리에 그 희망이 쓸려가고 있음을 들려준다. 샘 멘데스는 다른 매체를 접한 두 번째 계기부터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해 변화의 고민에 빠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로드 투 퍼디션>은 같은 관심에 다른 형식의 옷을 입혀본 영화이다. 정사헌/ 영화평론가 taogi@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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