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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여 투쟁하라, 살아남으라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2002-09-09

■ Story

중국집 만리장성의 배달소년 주(김현성), 어느 날 성냥팔이 소녀(임은경)에게 라이터 하나를 사서 라이터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건다. ”성소(성냥팔이 소녀) 재림에 접속하시겠습니까? 원하시면 1번을….” 주는 1번을 누르고 성소 재림 게임 속으로 들어간다. 성소의 사랑을 얻고 동화처럼 그녀를 얼어죽게 만들어야 승자가 되는 성소 재림 게임, 맨몸으로 플레이어가 된 주는 여기서 붕붕 날아다니며 쌍권총을 쏘는 트랜스젠더 라라(진싱)를 도와 비련파 악당들로부터 성소를 구한다. 그러나 주를 알지 못하는 성소는 주가 잠든 사이 다시 거리로 나선다(스테이지1 게임 오버). 성소가 시스템을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키는 스테이지2, 시스템에 잡힌 성소를 구하는 스테이지3가 이어진다.

■ Review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컴퓨터 게임은 <거짓말>의 여관방이다. 주위의 시선을 피해 여관방에서 그들만의 천국을 만든 연인들이 그랬듯 별볼일 없는 중국집 배달소년 주는 게임의 가상현실에서 불쌍한 소녀를 구하는 영웅이 되려 한다. J와 Y가 가학과 피학의 몸부림에 엉켜붙어 ‘도피’한 것처럼 주는 철가방 안에서 기관총을 꺼내드는 ‘환상’에 빠지는 것이다. <거짓말>이 세개의 구멍에 관한 ‘거짓말’이었듯,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3개의 스테이지로 나눠진 게임 ‘성소 재림’이다. 이번에도 장선우 감독의 도발은 자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제작비 100억원의 액션블록버스터라는 입간판 뒤에는 출구없는 세상에 대한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다. ‘성소 재림’은 <매트릭스>의 변화무쌍한 쾌감보다 <아바론>의 작가적 야심쪽에 비중을 둔 게임이다.

무성영화와 CF영상 사이 어디쯤에서 탄생한 이 영화의 첫 시퀀스는 성소 게임의 전제를 확실히 일러둔다. 펑펑 눈이 쏟아지는 겨울밤, 한파가 몰아치는 도시에 라이터를 파는 소녀가 나타난다. “라이터 사세요. 라이터요.” 목소리마저 얼어붙어 떨어지지 않건만 사람들은 소녀를 외면한다. “아가야, 그런 장사말고 먹는 장사를 해봐.” “라이터 두개 사줄게. 네 몸을 주지 않으련?” 춥고 배고픈 소녀는 쓰러지지만 이곳에 자비심이 숨쉴 자리는 없다. “라이터 가스라도 마셔봐. 질 좋은 부탄가스지.” 영화의 모티브가 됐던 김정구 감독의 시가 바늘 튀는 소리까지 선명한 LP판의 옛 노래 <목포의 눈물>과 어우러지면, 주가 게임에 뛰어드는 이유는 자명해진다. 슬픔이 하염없이 내리는 이곳에서 벗어날 길은 무엇인가? 주는 라이터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어 성소 게임에 참가한다. 게임의 규칙은 단순하다. 성소의 사랑을 얻고 그녀를 얼어죽게 두면 된다. 하지만 어떻게? 스테이지1에서 해치울 악당은 깡패인 오인조와 비련파 일당이지만 그들은 그저 시스템의 하수인에 불과하다. 성소가 총을 들고 반란을 꾀하는 스테이지2에 이르면, 시스템은 군대와 경찰로 확장된다. 주의 총구는 시스템을 향해 불을 뿜는다.

스테이지2에서 성소는 시스템에 의해 ‘버그’로 규정받는다. 군인들이 성소를 옹호하는 이들을 폭력진압하는 장면에서 버그는 80년 광주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버그를 색출하는 시스템이 잔인한 현실의 은유임은 자명하다. <아베마리아>의 선율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성소가 자신을 박대하고 괴롭힌 이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대목은 얼어죽어가는 성소를 그린 첫 시퀀스와 뚜렷한 대구를 이루며 시스템에 대한 적의를 부추긴다. 뒤이어 군인들에 쫓겨 막다른 상황에 이른 성소의 모습, 아찔한 추락은 비극의 정점을 향한 가파른 상승이기도 하다. 그러나 단계가 올라갈 때마다 업그레이드되는 게임의 강도와 달리 이 영화의 드라마는 가속도가 별로 없다. 사랑에 대한 성소의 기억이나 현실세계의 친구였던 주와 이의 대결 등 밑바탕에 깔린 이야기들은 가슴에 파고들 만한 울림을 만들지 못한다. 아드레날린을 분출시키는 와이어액션을 선보이면서도 액션의 서스펜스와 리듬감이 떨어지는 느낌이 드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 중국집 배달소년 주는 게임 속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라라 크로프트의 트랜스젠더 버전인 라라(진상)은 멋진 춤솜씨와 오토바이 액션을 선보이지만 어딘가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실은 ‘성소 게임’의 딜레마도 여기 있다. 드라마의 정서적 파장과 게임의 감각적 흥분 사이에서 장선우 감독이 시도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배틀 로얄>에 비하면 무겁고 <아바론>에 비하면 가볍다. 장선우식 균형점은 그가 택한 키치미학에 맞닿아 있다. 흘러간 트로트 명곡 <목포의 눈물>부터 <아베마리아>를 거쳐 목탁소리가 들리는 피날레로 이어지는 달파란과 장민승의 음악, 프로덕션디자이너 최정화가 조율했을 세트, 조명, 의상, 소품의 요사스런 색감과 디자인은 고상함과 품위에 시비를 건다. 여기 덧붙여 장선우 감독은 때로 뻔뻔스럽게, 더러 우스꽝스럽게 수많은 액션영화의 장면들을 베끼고 남용하고 조롱한다. 오우삼의 쌍권총 안무이든 <매트릭스>의 공중부양 액션이든 거리낌없이 갖다 쓰고 극단적으로 과장해서 코믹한 경지까지 이른다. <툼레이더>의 라라 크로포드를 트랜스젠더로 변형시킨 라라, 태연히 무기 밀거래를 하는 오뎅집 주인, 미끼없이 낚시하며 세월을 낚았던 강태공을 닮은 추풍낙엽,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조폭 오인조 등 조연 캐릭터들이 합창하는 유머에서도 한껏 경박해지려는 감독의 의지는 확연하다. 성소 게임의 대립전선은 정치적인 것을 넘어서 현실에 뿌리박은 모든 권위에 대해 그어진다.

♣ 이 영화의 액션 스펙터클은 극단적인 과장을 거리끼지 않는다. 그것은 장선우식 키치미학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 대부분이 그랬듯 이번 영화도 논쟁의 화약이 가득 담긴 작품이다. 장선우식 키치미학과 막대한 제작비는 어떻게 양립하는가? 드라마를 버리고 게임을 택해서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 성소 게임의 액션과 시공간은 새로운 경지인가, 작가의 관념이 만든 모래성인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 당분간 영화사이트 게시판을 시끄럽게 한대도 놀랄 일은 아니다. 이 영화의 엔딩은 2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게임 오버’로 끝나는 우울한 버전이고 다른 하나는 ‘유 윈’으로 끝나는 해피엔딩이다. 선택은 플레이어 혹은 관객의 몫인가? 그렇지는 않다. 게임이 끝나면 다시 자장면 배달에 나서야 하는 주, 현실과 환상을 대비해 보여주는 것은 시스템이 지지 않은 증거일 뿐이다. 싸움은 계속된다. 장선우의 영화는 거짓말이든, 게임이든, 실재이든, 가상이든 세상과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유치해도, 더러워도, 우스워도, 슬퍼도 투쟁하는 동안 살아 있다. 하지만 그의 전언은 다시 풀리지 않는 의문이 되어 돌아온다. 영화가 세상과 싸우는 무기라면, ‘어떤’ 무기여야 하는가?남동철 namd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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