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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페이스풀>이 내포한 에이드리언 라인식 상투성(2)
2002-09-05

불륜은 가라?

행위의 대구, 불완전한 화합을 위한 연가

그렇지만, 코니와 에드워드는 결코 서로를 증오하여 파멸시키려는 관계로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아내와 정부가 짜고 남편을 죽이려들거나, 아내의 외도에 미치광이가 된 남편이 그 둘 모두를 죽이기 위해 계획을 짜지는 않는 것이다. 에드워드와 코니 둘 사이를 대응시키는 행위의 ‘대구’가 그들을 서로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니는 폴과의 첫 번째 정사를 나눈 뒤, 기차 안 화장실에서, 그의 정액을 닦아내려는 듯 정신없이 화장지를 뜯는다. 한편, 에드워드는 살인을 저지른 뒤, 아들의 학예회가 열리고 있는 학교로 찾아가, 그곳의 화장실에서 폴의 피를 닦아낸다. 또는, 코니의 행동에 의심을 느낀 에드워드가 날 사랑하냐고 묻자, 당황한 코니는 그렇다고 대답한 뒤, 방에 남아 있는 에드워드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전등을 끄고 나가려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리고 자신의 살인행위에 넋이 나가 있던 에드워드는 각각 다른 신발 한짝씩을 신고 코니 앞에 나타난다.

서로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흔적을 지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그 둘이 마주한 상황에서는 징후적인 행위의 착오를 번갈아 반복한다. 결과적으로, 에드워드와 코니는 그들의 결혼생활을 파경으로 몰고 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각각 대조의 구도로 놓여 있는 에드워드와 폴은 유리장식과 책으로 상징화되는 사물의 분신화를 통해 사건을 일으키거나, 그 잔해를 내러티브화한다. 에드워드가 폴을 죽이는 이유는 그 유리장식, 즉 25년 뒤에 아내가 보기를 바라며 편지와 가족사진을 넣어둔 바로 그 유리장식이 폴의 집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폴의 실종을 수사하기 위해 경찰이 코니를 찾아왔을 때, 그녀의 품에는 여전히 폴이 선물한 책이 품에 안겨져 있다. 서로가 멀찌감치 떨어져 객관적 대조로서만 존재해야 했던 에드워드와 폴의 위치가 서로의 자리에 파고들 때 사건이 일어난다. 코니와 폴의 만남을 위해 불어온 인위적 바람과, 에드워드가 폴을 죽이도록 만든 그 유리장식에 새겨져 있는 ‘windy city’라는 문구의 교차성!

관음증과 도덕률 법칙 너머의 무엇

사물들이 펼치는 이야기의 갈등(대조의 내러티브)과 행위의 착오가 깨우치게 하는 도덕률(대구의 내러티브)이 에드워드와 코니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이제부터는 이 둘 모두가 주인공이다. 그러니까 <언페이스풀>은 코니의 행동을 중심으로 하는 앞부분과 에드워드의 의혹과 살인을 중심으로 하는 중간부분, 그리고 이 둘이 서로의 사실을 교환한 채 이어나가는 마지막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에드워드와 코니의 행위가 대구를 이루고 있는 것은, 폴의 죽음을 계기로 이 둘을 불완전한 화합의 장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만약 에드워드와 코니 둘 중 하나에게 죽음이 내려진다면 영화의 이야기는 틀어진다. 그러므로 사실 폴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던 셈이다. 아니, 그보다는 코니에게는 섹스를 제공하고, 에드워드에게는 살인을 유도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즉, <언페이스풀>은 충분히 관음증의 시각으로 눈을 쾌락으로 유인한 뒤에, 도덕률의 법칙으로 불완전한 합의에 이르게 한다. 지금까지의 에이드리언 라인의 영화가 그렇듯 <언페이스풀> 역시 마치 쾌락의 함정에 빠져버린 주인공과 그/그녀를 둘러싼 위기국면으로 치닫는 영화인 것만 같다. 이미 가정은 균열되었으며, 쉽게 이어놓을 수 없는 간극이 생긴 것만 같다. 경찰서 옆에 세워져 있는 차에서 미래를 중얼거리며 영화는 불안하게 끝난다. 불륜을 소재로 결혼이라는 허약한 계약관계의 본질을 드러내고, 몸의 욕망을 빌려 정신의 사랑을 해체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는 그러나 이상한 메아리를 동시에 울린다. 분출되는 섹슈얼리티와 그로 인한 위기가 지배하는 에이드리언 라인식의 클리셰적 결말, 이라고만 단정짓기에는 부족한, 무언가 다른 독해가 요구된다. 명징한 독해 이외의 시선들이 남는다.

침묵의 외침, "가정을 사수하라!"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사랑’이란 무엇이 아니라, 어떤 역할이다. 에이드리언 라인의 영화에서 사랑 따위는 자리를 찾이할 곳이 없다고 말한다면, 과연 이 영화가 ‘사랑한다’는 의미전달 행위를 폴쪽으로 향하지 않고, 끝까지 아껴둔 채 에드워드에게만 향하게 하는 것은 또한 어떤 징후에 속하는 것일까. 에드워드가 아내와 헤어지지 않는 것은, 그녀가 폴에게 남긴 절교선언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전화로 폴에게 마지막 남기려던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코니와 폴의 관계는 끝내 불순한 불륜의 기억으로만 남게 된다. 코니는 폴을 처음 만난 그때를 회상하며, 택시를 타고 곧장 집으로 왔어야 했다고 후회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벌어진 그 불륜은 영화의 나머지 부분이 전할 수 없는 말초적 쾌락을 이미 시각적으로 만족시켰다. 그것으로 역할을 다한 것이다. 이것은 에이드리언 라인이 언제나 동어반복하는 것 중 하나이다. 그런 뒤에 그 불륜의 기억을 가지면서 에드워드와 코니는 미래를 설계한다. 불륜을 저지른 코니는 남편 에드워드에게 용서받고, 살인을 저지른 에드워드는 경찰에 잡히지 않는다. 둘 중에 벌을 받거나 피해를 보는 사람은 없다. 이제 다시는 그런 일을 벌이지 않으면 될 것이고, 또 그럴 것이라고 다짐한다. 따라서, 관음증의 쾌락은 성취되고, 윤리의 협약은 지켜진다. 마지막 남은 ‘사랑’이라는 담보물을 가지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면서, 균열적인 상태 그 자체로 멈춰 서버린다. 그럼으로써 이 영화는 오히려 불륜이 일으키는 죄악의 견본으로 제시되면서, 가정을 공고히 하는 판타지를 내포화하게 되는 것이다.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다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에이드리언 라인 영화에 “불륜은 가라”라는 외침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독해의 자유일까?정사헌/ 영화평론가 taogi@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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