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태와 영자, 1979년 감독 하길종 출연 이영옥 EBS 9월8일(일) 밤 10시
<바보들의 행진>에서 기차를 타고 떠났던 병태는 어떻게 되었을까? “계절이 몇번 바뀌면 돌아오겠네”라고 군에 입대하는 병태를 위로하던 영자는? <병태와 영자>는 하길종 감독의 유작이다. <바보들의 행진>(1975)의 속편인 이 영화는 감독의 후기작 <속 별들의 고향> 등이 그렇듯 상업영화의 전형성과 타협한 흔적이 남아 있다. “고래를 잡으러 동해바다로 떠나야겠네”라고 뇌까리며 깊은 바다로 추락했던 청춘, 그들의 우울한 정서를 그렸던 전작에 비해 깔끔한 대중영화다. 그럼에도 <병태와 영자>는 지금에 와서 되돌아보건대 평가절하된 면이 없지 않다.
병태가 군에 입대한 뒤 영자가 면회를 온다. 외박을 허가받은 병태는 영자와 밤을 함께 보내지만 방을 따로 쓰는 처지다. 영자는 병태를 향한 일편단심을 고백하지만 부모의 강압으로 결혼준비를 하고 있음을 말한다. 제대한 병태는 영자와 결혼하기 위한 여러 작전을 짠다. 젊은 의사 주혁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 영자는 고민 끝에 다시 병태를 만나기로 결심하지만 연인들의 다툼은 끊이질 않는다. 주혁과 병태는 약혼식장에 누가 먼저 도착하는지 내기를 걸고 승부에서 이긴 사람이 영자와 결혼하기로 한다.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오락영화.” 당시 평단의 반응에서 알 수 있듯 <병태와 영자>는 하길종 감독의 영화치곤 가볍고 경쾌하다. 영화에서 병태는 새로운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바보들의 행진>에서 그가 정체를 뚜렷하게 파악하기 힘든 시대 분위기와 대적했다면, 친구의 자살이라는 걸림돌에 넘어졌다면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구체적이다. 영화에서 병태의 목표는 한 가지다. 영자와 어떻게 하면 결혼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것. 능력있는 의사와 라이벌이 된 병태는 흔해 빠진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 경쟁에서 최후의 승자로 남는다.
<병태와 영자>는 코믹멜로물의 평범한 공식에서 비켜가질 않는다. 그렇지만 하길종 감독은 영화 중간에 의미심장한 장면을 여럿 배치했다. 예를 들어 “우리, 당장 결혼하면 되잖아”라고 억지 부리듯 하며 병태가 영자의 손을 잡고 신나게 시내를 질주하는 장면이 있다. 평이한 것 같지만 느린 속도로 지나가는 이 장면은 묘하게 1970년대라는 질곡의 시대를 통과하는 청춘의 어두운 그림자를 포착한다. 연인과 사이가 틀어진 영자가 비오는 밤 선글래스를 낀 채 방 안에서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대목 역시 비슷한 정서를 내비친다. <병태와 영자>는 결말이 <졸업>과 흡사한 탓에 미국영화의 모방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받은 적 있다. 이번에 방영되는 복원판에선 우리가 알던 <졸업>의 패러디가 아닌, 좀더 희망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하길종의 유작이, 감독의 영화적 마침표가 바뀌는 순간이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wherever70@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