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공륜 위원장이 무슨 시인인가 그랬다고. 그런데 내 영화 <헬로우 임꺽정>을 20분 이상 잘라낸 거야. 그게 엔딩까지 가는 설정인데 그걸 통째로 들어내니까 무슨 이야기가 되겠어. 오죽 억울했으면, 공륜 사무실 앞에서 위원장 나오길 기다리다가 쌍소리 해가면서 따졌다고. 심지어 추격전을 벌이기도 했어. 그러다 서울 피카디리극장에서 개봉할 날이 됐는데, 너무 갑갑한 거야. 그래서 NG 컷을 가져다 붙였지. 오죽했으면 그랬겠어. 근데 다음날 공륜 직원들한테 걸려서 서로 멱살잡이하는 걸로 그냥 그렇게 끝났지.”(박철수 감독)
1981년
팀스피리트 훈련 시작. 제5공화국 출범. 대통령 친인척 사기행각으로 구속. 서울올림픽 유치. 야간통행금지 해제. 한국프로야구위원회 창립.
정권이 바뀌었으나, 검열은 여전했다. 웃지 못할 해프닝이 속출하고, 검열을 피하기 위한 편법들을 고안하기에 바빴다. 문화공보부와 공륜의 단골 손님이었던 이장호 감독의 <어둠의 자식들-카수 영애>도 씁쓸한 기억 하나를 갖고 있다. 후속편 제작 허가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이 작품은 81년의 어느 날 베를린영화제 사무국으로부터 춤품의뢰를 받아든다. 그런데 검열 당시 해외불가 판정까지 받은 터라 출품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프린트는 무사히 보내졌다. 뒤에 알고보니 제작사가 보낸 작품은 비슷한 제목의 <오염된 자식들>이었던 것. 실제로 시나리오 심의가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촬영에 몰래 들어가는 영화도 있었다. 검열관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방안도 여러 가지였다. 이두용 감독은 검열이 예상되는 장면의 경우, 일단 길게 찍어서 보냈다. 5초면 충분할 장면을 10초를 찍어서 보냈다. 때론 여지없이 제거됐지만, 종종 몇초 분량의 장면이라도 건지는 경우가 있었다. 김수용 감독은 잘려도 무방한 ‘희생컷’을 끼워넣어 검열관의 시선을 끌었다. 물론 여의치 않을 경우, 희생컷이 살고, 숨기려고 했던 장면은 잘려나가는 최악의 경우를 맛보기도 했다. 검열관과 친분이 있는 경우, 검열관에게 문제의 장면시 말을 걸어 타이밍을 빼앗는 대담무쌍한 감독 또한 있었다. 어쨌든 3S정책과 함께 5공 아래서 검열은 성적 표현에 대해서는 다소 관대해졌다. 다만, 반공과 체제유지를 위해서 검열은 여전히 완강했다. 1년 전,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은 남편이 빨갱이로 내몰리자 구명운동에 나선 아내가 검사의 음모에 걸려든다는 내용의 영화로 30분가량이 삭제된 채 만신창이가 되어 극장에 내걸렸다.
1985년
미문화원 점거 사태. 80년 이후 노사갈등 정점. 이념서적 판금. 총선 편파보도 등으로 인해 시청료거부운동. <비내리는 영동교>를 필두로 트로트 가요 부활. 싸구려 옷으로 멋을 내는 일명 ‘마돈나 패션’ 강타. <깊고 푸른 밤> <어우동> 흥행기록 작성. 공륜, 연소자 관람불가 규정을 중학생 이하 관람불가와 고등학생 이하 관람불가로 나누어 등급분류를 4등급으로 나눔.
이태원은 오랫동안 금제의 공간이었다. 이원세 감독의 <여왕벌>이 갈기갈기 찢겨진 데는 그런 이유가 작동했다. 절대로 넘봐서는 안 되는 곳에 카메라를 드리운 괘씸죄가 적용된 것이다. 미국인과의 사랑이 실패로 끝난 뒤 여왕벌이라는 별명을 갖고서 이태원에서 살아가는 한 여자가 결국 아메리카에 대한 세간의 동경에 조종을 울리기 위해 복수한다는 내용의 줄거리는 당시 불붙기 시작한 반미운동에 민감해진 정부를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뒤 이 감독은 한국을 떠나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되는 아이러니에 휘말린다. 이듬해 김유진 감독의 <영웅연가> 역시 “영화 도입부에 흑인이 권총으로 신부를 쏘는 장면이 반미감정을 부추길 수 있다 해서 까맣게 처리됐다”. 85년, 박철수 감독의 <헬로우 임꺽정>은 임꺽정이 진상품을 탈취해서 양민들에게 나눠주는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약 20분 분량이 “도둑을 미화했다”는 이유로 모조리 삭제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듬해 김수용 감독은 공륜이 <허튼소리>의 중광 스님이 분뇨를 뒤집어쓰는 장면 등 10여 장면을 문제시하자 감독을 그만두겠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공륜의 가위질이 더욱 난폭해진 데는 사회적인 정황도 있었지만, 이에 앞서 이장호 감독의 <어우동>의 특정장면을 통과시킨 것이 정부의 심기를 거슬러 결국 공륜 위원장이 교체되는 등의 사태와 무관치 않다. 실제 1979년부터 95년까지 공륜의 본심의 통계자료를 보면, 85년과 86년의 심의신청한 작품 중 수정비율이 무려 80%를 넘었다. 그들은 과잉 충성으로 무엇을 얻었을까.
1989년
현대중공업, 100여일 동안 장기 파업. 서울지하철 노사갈등에 정부 공권력 투입, 전원연행.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 문익환·임수경 방북.
시나리오 검열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81년 형식상 폐지되었으나 영화제작 신고시 시나리오를 제출해야 하는 상황은 시나리오 사전 검열이 가능하게끔 만들었다. 5차 영화법 개정이 있었던 85년 이후에도 안기부, 국방부, 내무부, 문공부 등 관계기관의 심의 참여는 계속됐고, 87년 6·29 선언을 기점으로 점점 줄어들다 완전히 자취를 감춘 셈. 그렇다고 영화에 대한 검열의 강도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87년 이후 90년까지 <거리의 악사>(정지영 감독, 주인공이 지프차에 연행되는 장면, 집 철거시 주인공의 어머니가 기절하는 장면 삭제), <인간시장’89>(진유영 감독, 물고문, 성고문, 할복자살 장면 삭제), <그들도 우리처럼>(박광수 감독, 광주 관련 다큐멘터리 삭제), <젊은날의 초상>(장길수 감독, 대학생 투신장면, 경찰이 정복 입고 술집 여인과 어울리는 장면 삭제), <있잖아요 비밀이에요1>(조금환 감독, 옥상 투신장면 등 삭제) 등이 검열로 인해 피해를 본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이중 박종원 감독의 <구로아리랑>은 노동자의 사진이 군홧발에 짓밟히는 장면, “그 부자놈…” 등의 대사들이 “계급투쟁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4분가량의 약 20여 장면이 삭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