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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물등급위 심의잣대 논란
2002-08-30

영상물등급위원회(영등위, 위원장 김수용·73)가 흔들리고 있다.

문제가 불거진 건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에 대한 등급 심의 과정에서다. 영등위 영화등급분류소위원회(위원장 유수열·63)는 지난달 23일 이 영화에 대해 ‘제한상영가’ 등급 판정을 내렸다. 한국 안에 제한상영관이 단 한 곳도 없는 현실에서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는다는 것은 개봉을 할 수 없다는 걸 뜻한다. 영화 제작사인 메이필름 쪽은 지난 9일 재심을 청구했고, 지난 27일 영등위는 전체회의에서 <죽어도 좋아>에 대해 다시 ‘제한상영가’ 등급 판정을 내렸다. 이 결정에 반발해 지난 28일에는 임정희(45·민예총 지도위원), 박상우(37·게임평론가), 조영각(32·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등 영등위 위원 세 사람이 위원직을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세 사람은 ‘영상물등급위원회 사퇴 성명서’를 통해 “심의에 참여한 거의 모든 등급위원이 ‘<죽어도 좋아>는 음란성을 지니지 않은 영화’라는 것을 인정”했음에도 “‘떠드는 건 소수고 침묵하는 다수는 이 영화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는 황당한 주장”을 근거로 결국 ‘제한상영가’로 결정됐다고 지적했다.

영등위 김수용 위원장은 “이 영화가 ‘18세 이상 관람가’를 받으면 앞으로 ‘과도한 노출과 성행위가 묘사된 영화’가 쏟아져나올 경우 형평의 원칙에 따라 똑같이 ‘18세’ 등급을 내릴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가장 크게 작용했다”고 이번 결정에 대한 배경을 설명한다. 그러나 이번에 사퇴한 세 명의 위원은 바로 이 점을 비난한다. ‘신체의 노출’이나 ‘성행위 묘사의 정도’ 따위를 등급 심의의 기준으로 삼는 건 너무도 편의적인 발상이라는 것이다. 과거 군사정권의 검열기관이던 ‘공연물윤리위원회’의 경우 신체의 특정부위, 쉽게 말해 “(여성의) 젖꼭지나 거웃이 보이면 안 된다”는 따위의 단순무식한 지침을 등급 판정의 기준으로 삼았던 게 사실이다.

공륜이 공연예술진흥협의회(97년 10월)를 거쳐 영등위(99년 6월)로 바뀐 건 이 기관이 ‘검열기관’에서 ‘대국민 서비스 기관’으로 바뀌었다는 걸 뜻한다. 그렇다면 영상물의 등급에 대한 판정 기준도 과거처럼 사람 몸의 특정 부위가 스크린에 나오느냐 마느냐 따위의 획일적이고 편의적인 잣대를 들이댈 게 아니라, ‘청소년 보호’와 ‘표현의 자유의 신장’이라는 두 가치를 실현하는 차원에서 적극적인 개입과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이들은 “창작자가 창작의 고통을 받는 만큼, 연령 등급 서비스를 하는 영등위도 그만큼 의사 결정 과정에 대한 고민과 고통을 짊어져야 한다”며, 이번 결정은 영등위 위원들이 이런 책무를 포기하고 편의성만을 선택했다는 뜻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는 문화관광부 쪽도 영등위의 이번 결정에 대해 비판적인 분위기다. 정부의 ‘간섭’으로 비칠 것을 우려해 이름을 밝히길 거부한 문광부의 어느 고위 관계자는 “등급 심의를 민간의 예술가들에게 맡긴 이상, 이들이 창작물의 표현 범위를 좀더 적극적으로 확장하고 표현의 자유를 옹호할 것으로 기대되어왔음에도 이런 결정이 내려진 것에 대해 크게 실망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영등위가 과거 문공부 산하의 공륜 시절보다 더 관료적인 태도로 군림하고 있다는 하소연을 많이 접하고 있다”며 영등위의 편의적인 심의 태도를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결국 <죽어도 좋아>에 대한 영등위의 이번 판정은 공무원들보다 더 관료적이고 편의적인 태도로 영상 창작물에 대한 등급을 결정한 셈이다.

이상수 기자 lee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