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 미리 이야기하자면, <청춘군상>이라는 제목을 달고 국내에서 DVD로 출시된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는, 한글로 번역된 몇몇 영화 책들, 예컨대 펠리니의 회상을 담은 <나는 영화다>나 앙드레 바쟁의 <영화란 무엇인가?>에 <청춘군상>이라고 나와 있는 그 영화와는 다른 영화다. 후자의 <청춘군상>은 공허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게으르고 무기력한 다섯 젊은이들의 세계를 담은 펠리니의 53년작 <비텔로니>(I Vitelloni)를 가리키는 것이다. 반면 전자의 <청춘군상>은 <버라이어티 쇼의 불빛>이 원제인 펠리니의 50년작을 이른다. 그런데 따지고보면 여기에 붙여진 이 익숙한 제목은 <비텔로니>에 붙은 같은 제목에 비해 도대체가 의심스럽다. 나이 마흔이 넘은 중년 남자가 주인공인 영화가 영 혼란스럽게도 <청춘군상>으로 불려야 하는 이유는 뭘까?
여하튼 이제부터 <청춘군상>이란 제목을 쓸 수밖에 없게 된 이 영화는 우선 손쉽게 말하자면 백스테이지 스토리를 들려주는 수많은 영화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노랫소리가 들리는 어느 극장으로 들어간 카메라는 무대 위에서 익살스럽게 노래하는 한 중년의 남자를 보여준다. 상징적이게도 “내 여자를 잃었다네/ 정말 아름다웠지”라고 실연을 노래하는 그가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인 케코(페피노 델 펠리포)다. 이어서 카메라는 객석에 앉아 무언가 경탄해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미모의 젊은 여자 릴리아나(카를라 델 포지오)를 담는다. 이쯤 되면 눈치 빠른 관객에게 앞으로 두 사람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알아채기란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무대 위의 성공을 꿈꾸는 릴리아나는 거의 막무가내로 케코가 속한 극단에 합류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반하고만 케코는 같은 극단의 약혼자 멜리나(줄리에타 마시나)를 버린 뒤 릴리아나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갖은 애를 쓴다. 영화 속의 세 중심인물인 릴리아나, 케코, 멜리나는 서로 관계의 고리를 만들어내면서도 진정으로 마주보지는 못하는 인물들이다. 순진한 멜리나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오로지 케코뿐이지만 케코는 릴리아나를 연모하느라 멜리나에게 기꺼이 상처를 주고, 한편 릴리아나는 케코로부터 거의 눈이 멀었다고 할 만큼 뜨거운 애정의 시선을 받지만 그녀는 케코라는 힘없고 잘나지도 못한 남자보다는 무대에서 화려하게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자신의 꿈, 그리고 그 꿈이 이뤄지는 데 좀더 ‘실제적인’ 도움을 줄 만한 남자들에게 눈길이 가 있을 뿐이다. 이처럼 릴리아나는 케코로부터, 또 케코는 멜리나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듯한 일방향적 관계의 고리는 끝내 파열에 다가가고 만다. 버림받은 꿈과 충족되지 못하는 욕망에 대해, 영화는 어느 정도의 여유와 유머를 가지고 주제의 그런 씁쓸함을 상당히 중화해낸 듯한 톤으로 이야기해준다.
지나치게 야심이 많은 무대 위 여인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그린다는 점에서는 조셉 맨케비츠의 <이브의 모든 것>(1950)을, 그리고 일종의 ‘착취’관계에 있는 예인(藝人) 남녀가 주인공이라는 점에서는 펠리니의 <길>(1954)을 떠올리게 하는 이 영화 <청춘군상>은 펠리니의 감독 데뷔작이기 때문에라도 기억될 만한 영화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당시로선 애송이 감독에 불과한 펠리니의 옆에 이미 기반을 다져놓은 성숙한 영화감독 알베르토 라투아다가 자리하고 있었음을 잊기가 쉽다. 제대로 말하자면 <청춘군상>은 펠리니와 라투아다가 공동으로 연출한 영화다(영화에 출연하는 두 여배우 줄리에타 마시나와 카를로 델 포지오는 두 감독의 부인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순간 사람들은 이 영화가 과연 두 사람의 감독 가운데 어느 쪽이 주도적 인물이었는가를 자꾸만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그동안 많은 영화비평가들이 적지 않은 수고를 들인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현재 많이 잊혀진 존재인 라투아다보다는 이후에 거장 대접을 받게 될 펠리니의 체취를 맡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다양한 공연 양식에 대한 매혹은 펠리니의 영화세계를 관통하는 중요한 모티브 가운데 하나이며,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인 멜리나는 이후 <길>이나 <카비리아의 밤>(1957)에서 좀더 풍부하게 구현될 펠리니적 인물인 것이다. <청춘군상>은 그 결말도 펠리니적이라 부름직한 쪽을 택한다. 릴리아나에게서 버림받고 결국 멜리나에게 돌아오게 된 케코. 그러나 이처럼 신산한 경험을 하고도 배운 게 없는지 그는 마지막 장면에서 또 다른 젊은 여자에게 단순히 호기심이라고만 할 수 없는 강렬한 시선을 보낸다. 이건 “내 영화에는 이른바 라스트신이 없다. 이야기는 결코 종국에 도달하지 않는다”는 펠리니의 유명한 이야기가 자연스레 연상되는 순간이다.
Luci del Varieta/Variety Lights1950년, 흑백감독 페데리코 펠리니출연 페피노 델 펠리포, 카를라 델 포지오자막 영어, 한국어오디오 모노화면포맷 4:3 풀스크린출시사 스펙트럼
홍성남/ 영화평론가 antihong@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