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인도계 영국 소녀 제스(파민더 나그라)의 꿈은 베컴처럼 멋진 킥을 날리는 축구 선수가 되는 것이다. 전통적인 생활방식과 가치관을 고수하고 있는 제스의 부모는 제스의 꿈을 이해하지 못한다. 신부 수업 잘 받고 조신히 있다가 시집가길 바라는 것. 같은 동네에 사는 여자 축구단 소속 줄스(키이라 나이틀리)는 공원에서 공을 차던 제스의 화려한 플레이를 눈여겨보고, 코치 조(조너선 라이 메이어스)에게 소개해 훈련을 받도록 도와준다. 제스는 정식 축구 선수가 되는 동시에 줄스라는 든든한 동지를 얻게 되나, 그런 행복도 잠깐이다. 제스는 조에 대한 연정으로 줄스와 신경전을 벌이게 되고, 언니 혼사문제로 집안의 압력을 받는 등의 위기에 처한다.
■ Review
베컴의 커브 킥은 예술이다. 발끝을 떠난 공이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꽂힐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베컴뿐일 것이다. 거대한 바리케이드에 다름 아닌 수비수 진영을 긴 포물선으로 휘감아 뚫는 그의 킥 솜씨. 누군가 베컴 ‘헌정영화’를 만들겠다고 나선다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런 영화를 ‘인도계’ ‘여성’ 감독이 만들어냈다. 베컴의 킥에서, 여성으로서, 이방인으로서, 수많은 장애물을 통과하는 어떤 지혜, 삶의 기술을 읽어낸 까닭이다. <슈팅 라이크 베컴>은 그러니까, 단순한 축구영화가 아니다.
<슈팅 라이크 베컴>의 소녀들은 단순히 베컴을 흠모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바람은 베컴처럼 그라운드를 누비고, 그처럼 멋진 킥을 날리는 것이다. 란제리 코너에서 뽕 브래지어를 만지작거리는 대신 스포츠 브래지어를 골라잡는 그들에게는 “스파이스 걸 중에서 왜 스포티 스파이스만 애인이 없는 줄 아느냐”는 타박도 자극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오직 축구가 하고픈 씩씩한 소녀들도, “여자는 모름지기…”하며 딴죽을 걸어오는 세상 앞에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다. 사정이 어렵기론 보수적인 전통에 덜미잡힌 인도계 소녀 제스쪽이 더하다. 요리 배우고 신부 수업 받아야 할 나이에, 걸핏하면 ‘반벌거숭이’ 사내들과 뛰어노는 딸이 제스의 부모는 탐탁지 않다. 품행이 방정하지 못한 제스 때문에 그 언니가 파혼당할 위기에 처하는 등 제스를 막아서는 장벽은 점점 그 몸집을 불려나간다.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바로 ‘베컴처럼 차라’는 것이다. 때로 우리 앞의 장애물은 밀어붙여 무너뜨리기에 너무 크고 소중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제스에겐 부모가, 가족이, 전통이 그런 것이다. 격돌하는 대신 이해를 구하는 유연함. 제스는 베컴을 벤치마킹한 멋들어진 벤딩 슛으로 화합을 이끈다. 소녀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막혔거든 돌아서 가라. 인생의 한 고비를 넘어선 소녀 줄스의 깨달음이다.
♣ 줄스는 공원에서 공을 차는 제스를 눈여겨 보고 축구단 가입을 권한다. 스타 플레이어가 된 제스는 부모의 눈을 피해 축구 경기에 출전하는 이중생활을 감행한다. 고난은 그뿐이 아니다. 제스는 코치 조를 사이에 두고 단짝 친구 줄스와 냉전을 벌이게 된다.
영국에서 활동하는 유일무이한 아시아계 여성 감독 거린다 차다는 이렇듯 영화 속에 언제나 자신의 정체성을 반영한다. 서로 다른 세대의 인도 여성들이 해변으로 여행을 떠나는 여정을 따라잡은 데뷔작 <해변의 바지>, LA 이민자 가족이 추수감사절 회합에서 오래 곪은 갈등을 터뜨린다는 내용의 <왓츠 쿠킹>은 최신작 <슈팅 라이크 베컴>과 한가지 테마로 꿰어진다. 다양한 문화, 세대, 성정체성의 사람들이 어렵사리 서로를 끌어안는다는 것. 거린다 차다는 그런 갈등과 화합의 여정을 밝고 말랑말랑하게 그려내곤 하는데, <슈팅 라이크 베컴>은 그중에서도 가장 친절하고 유쾌하고 흥겨운 영화다. 빠르게 치고 받는 만담식 대사와 우스꽝스러운 오해들이 끊임없이 웃음을 자아내고, 인도의 전통 혼례식과 독일과의 축구 경기가 교차편집된 클라이맥스(다소 진부하고 안이하지만)에 이르면, 그 열기와 신명에 취하게 된다.
♣ ˝야 까까머리 사내가 뭐가 그리 좋다는 거니?˝ 터번을 둘렀다는 이유로 크리켓 선수의 꿈을 박탈당한 과거가 있는 아버지는 제스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슈팅 라이크 베컴>은 축구를 좋아하는 이들이나 그렇지 않은 이들, 모두가 만족할 다종다양한 서비스를 구사한다. 웬만한 축구팬이라면 알아차릴 축구 스타들이 등장하는데, 그중 도입부에 축구 해설자로 등장한 이가 80년대 축구 스타였던 게리 리네커다. 베컴도 자료화면이나 사진으로 등장하지만, 아내 빅토리아와 걸어가는 뒷모습은 안타깝게도, 대역 연기다. 축구팬들을 위한 서비스라면, 리얼한 경기장면을 빠뜨릴 수 없다. 이는 배우들이 전문 트레이너의 혹독한 훈련을 거쳐 실연을 한데다 촬영에서 그 생동감을 잡아냈기 때문. 리안의 초기작과 거린다 차다의 전작을 촬영한 대만 출신의 종린은 낮은 앵글에서의 빠른 움직임 포착에 강한 ‘위고’라는 장비를 개발해, 카메라로 포착하기 힘들다는 축구 경기의 리듬감을 잘 살려내고 있다. 배우들의 호연도 돋보이는데, 그중 반가운 얼굴이 하나 있다. 축구 코치 조를 연기한 배우는 <벨벳 골드마인>의 신비로운 미소년 조너선 라이 메이어스.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가 제스와 줄스의 굳건한 우정을 흔들어놓는다는 설정에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여전히 매력적인 모습이다. 박은영 cinepar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