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파치노가 뚜벅뚜벅 걸어다닌다. 상체는 거의 움직이지 않고 하체는 끌려가듯이, 그러나 빠르게 걷는다. 그가 그렇게 걷는 것은 초조함과 인섬니아, 즉 불면증 때문이었다. 표면적으로야 알래스카에서 발생한 여고생 살인범을 잡기 위해 쫓아다니지만, 마음은 자신을 향한 경찰국 내사과의 수사에 쏠려 있다. 그러나 백야의 알래스카에서 불면증에 시달리는 뛰어난 형사 윌 도머(알 파치노)의 초조함과 불면증은 다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로빈 윌리암스는 잰 걸음으로 걸어다닌다. 약간 뚱뚱한 몸매를 날렵하게, 얇은 입술은 영악하게 움직이며 도머 형사를 농락한다. 그는 미쳐있지만 자신이 미쳐 있다는 걸 모른다. 그는 탐정 소설 작가지만 궁핍하며 개 두 마리를 키우고 있다. 월터 피치(로빈 윌리암스)가 개를 키우는 이유는 도머 등을 방어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인썸니아>는, 기억상실증 때문에 기억해야 할 일은 사진과 문신으로 해결해야 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헷갈리는 살인극 <메멘토>를 만든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만들었다. 감독은 관객과의 게임에서 또 이겼다. 전술은, 이야기를 꼬거나, 끝에 가서야 풀리는 짧은 이미지를 초반에 노출시킴으로써 끝까지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초반에 도머 형사는 파트너 햅 형사(마틴 도노번)와 싸운 지 얼마 뒤 실수로 그를 죽인다. 햅은 경찰국 내사과에 협조하려던 참이었다. 이후 도머를 존경했던 알래스카의 여형사 엘리(힐러리 스웽크)는 햅 형사 사건 보고서를 작성하다가 도머를 의심하기 시작한다.이야기의 축은 '살인범 추적 - 햅과의 갈등 - 햅 사건과 피치 사건의 뒤섞임'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초반부터 계속 나온 정체모를 이미지, 피가 번지는 모습 등이 관객들에게 하나둘씩 설명된다.하지만 뭐 대단하거나 심오한 것은 아니다. 놀런 감독이 관객과의 게임을 위해 배치한 숨겨진 정보일 뿐이다. 이미지를 빠르고 멋있게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궁금증을 끌어냈을 뿐이다. 영화 속에는 도머와 피치의 게임이 벌어지지만, 정작 감독의 관심은 관객과의 게임인 듯하다. 하지만 나는 도머 형사가 아니라 알 파치노를 본다. 주름진 늙은 얼굴과 초조함과 불면증에 시달리는 알 파치노를 본다. 그의 불면증에 감연된 듯 괴로워하면서 그가 빨리 잡든 잡히든 잠을 푹 자기를 원한다. 또 로빈 윌리암스는 알 파치노를 너무 괴롭혔다. 초라하게 늙었지만 반반하고 영민한 표정과 사람 눈을 보지 않는 눈초리는, 이중삼중으로 꼬여있는 그래서 지쳐버린 중년의 표정 바로 그것이다. 불면증의 원인은 도머의 자책감이었고, 피치가 개를 키우는 이유는 인간들로부터 버림받았기 때문인지 모른다.그렇다면 정작 감독이 하고 싶었던 얘기는 아예 없었거나 아니면 절대적인 선악은 없다는 고루하고 상투적인 얘기였을 것이다. 알 파치노가 알 파치노인 것 대단하지만, 이 스릴러는 스릴러일 뿐이다. 이효인/ 영화평론가, 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