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썸니아>를 보고 나오던 중 듣게 된 두 관객의 짧은 대화형 감상문, 혹은 솔직하게 튀어나온 즉자적 20자평. “영화 어때?” “음… 음… 너무 질질 끄는 것 같아.” 이 영화가 무언가 질질 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플롯 안에 반전의 논리가 성립되어 있지 않음을 불평하는 것과도 같다. <식스 센스>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기대에 <인썸니아>는 부응하지 않는 것이다. 118분 러닝타임에서 70분이 지나자마자 당연한 듯 범인이 얼굴을 들이미는 <인썸니아>는 누가 범인인가라는 질문에 너무 빨리, 너무 친절하게 대답한다. 조금 다른 구성에 기대긴 하지만, <메멘토>에 이어 포와르식 회색 뇌세포의 활약은 다시 한번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첫째, 이 영화에서 ‘추리는 필요치 않으며, 서프라이즈 효과는 없다’.
한편 살해당한 여고생 케이는 결코 <트윈 픽스>의 로라 팔머가 될 수 없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그 사건에 관심이 없으며,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알래스카까지 날아온 윌은 그녀의 죽음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여고생 살인, 외딴 지역, 외부에서의 해결자라는 <트윈 픽스>의 익숙한 이야기를 상기하며 초자연적인 세례를 받으려고 마음먹는 찰나에, 영화는 린치의 세계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철조망을 세운다. 둘째, ‘인간과 풍경 사이의 전치적 관계가 우리를 그 안에 머물게 한다.’ 케이와 함께 영화 속에서 잊혀지는 것은 윌의 총에 죽어간 햅이다. 햅이 죽은 이후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의 죽음이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죄의식의 심연에서 헤매는 윌의 행보이다. 순간마다 그의 모습이 화면을 지배한다고 해도, 그것은 윌을 통해서만 투영될 수 있는 허상으로 존재한다. 셋째, ‘사건은 죄의식을 불러오기 위한 끄나풀이다.’
놀란, 히치콕을 이해한 감독
추리소설의 허탈감을 극복하기 위해 히치콕이 사용한 것은 서스펜스의 계율이었다. 요식행위로서의 에필로그에 바쳐지기 위해 지루할 정도로 지연되는 지적 수수께끼 퍼즐을 히치콕은 반대했다. 오히려 일찍 드러나야 할 것은 탁자 밑에 폭탄이 있다는 사실이며, 그것을 관객이 알아차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15초의 놀람보다는 15분간의 서스펜스”를 히치콕은 선택한다. 그리고 그 효과를 위해 그 누구보다 관객은 많이 알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그런 히치콕의 말을 자의적으로 이해하는 편이다. 어떻게든 수단으로 사용하고 제어받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 같다. 누아르적 수수께끼로 점철된 <메멘토>에 등장했던 ‘세미 젠키스를 기억하라’의 맥거핀적 역할처럼.
그가 이번에는 히치콕적 서스펜스 구조를 들여와 영화의 플롯을 짠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할 사항이 있다. <메멘토>에 홀려 ‘기억’의 모티브에 매달리기 시작하면 이 영화는 허무함의 극치로 보일 수밖에 없다. 과거로 돌아가는 역순에 따라 <메멘토>는 관객에게 암기와 복기를 요구한다. 관객은 인물들의 이름을 외우고, 사건들을 조합하며, 또한 판단해야 한다. 레너드에겐 아내를 죽였다는 죄목이 있지만, 그가 죄의식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은 15분뿐이며,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마지막 시퀀스에 이르러서다. 단말마의 죄의식으로 치닫지만, 영화를 지배하는 것은 기억과 망각, 그 사이를 오가는 오류의 반복이다. <메멘토>의 기억의 모티브가 한편으론 플롯 내의 진행구조로서, 그리고 또 한편으론 그 플롯을 따라가야만 하는(너무 많이 모르고 있는) 관객과의 관계에서 이중적으로 작동한다면, <인썸니아>에서 관객은 서스펜스 구조에 의해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오히려, <인썸니아>에서 관객은 암기와 복기의 의무감에서 벗어난다. 대신 짊어지는 것은 서스펜스가 불러온 죄의식의 무게다. 그러므로, 서스펜스 구조가 갖다놓으려 하는 것은 형식의 긴장감이기보다, 인물의 죄의식인 것이다. 그것은 윌과 월터의 대면을 앞당기게 한다(놀란의 두편의 영화는 누아르의 컨벤션 내에 히치콕의 장치를 끼워넣거나, 히치콕의 플롯을 전제로 하여 누아르의 세계관으로 나아가는 식의 비정형적인 행로를 지니고 있다. 어느 한쪽으로 쏠려 있지는 않다. 예를 들어 무엇보다도 놀란이 히치콕과 부딪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히치콕이 이루어놓은 ‘모성적 세계’에 쉽게 진입하기를 꺼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아예 그런 점은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다. 이런 점에서 보면, 놀란의 영화는 점점 더 사내들의 영화가 될 공산이 커 보인다. 한 발짝만 헛디뎌도 아버지의 굳건한 드라마가 성립되거나, 그런 아버지가 되는 아들의 과정이 그려질 것 같은 아슬아슬함이 있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이 <샤이닝>을 연상시키고, 남성성을 지닌 배우 힐러리 스왱크가 윌의 마지막 유언을 들어야만 하는 것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기억의 퍼즐에서 고백의 사슬로
영화는 점점 더 스릴있게 꼬여가기보다, 점점 더 답답하게 얽혀간다. 좀더 명료하게 말하자면, 이건 기억의 퍼즐이 아니라, 고백의 사슬이다. 고백해야 하는 의무를 느끼는 이유는 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인데, 그 죄에 대해 처벌을 내릴 자가 마땅치 않다. 처벌을 해야할 자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인썸니아>와 마찬가지로 영화 중반에 이미 범인이 등장하는 <쎄븐>은 오해 섞인 신의 윤리에 따라 죄인과 처벌자를 명확히 가름한다. 연쇄살인마는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 처벌자라고 믿는다. 그 때문에 뒤집힌 논리로 명쾌함이 유지된다. 그러나 <인썸니아>에서는 처벌자가 죄지은 자가 되고, 죄지은 자가 목격자가 되면서, 그리고 둘 모두 자신의 죄에 대해 인식하면서, 이상한 거래와 협박과 동맹의 관계가 이루어진다. 법을 앞세운 인간의 윤리 속에서 명확함은 사라진다. 오히려 오인된 확신은 끝까지 오류를 굽히지 않는 <쎄븐>의 연쇄살인마에게만 남는 것이다.
먼저 고백하는 인물은 살인자 월터다. 그는 윌에게 전화를 걸고, 그가 케이를 죽인 경위를 낱낱이 말하기 시작한다. 찬찬히 모든 사실을 털어놓은 뒤에 그가 윌에게 말한다. “들어줘서 고마워. 털어놓고 나니 속이 시원하군.“ 그러고나서는 자신도 윌의 심경을 들어주겠노라고 허심탄회하게 제안한다. 관객이 웃는다…. 그러나 월터의 행동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월터가 윌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아도 된다고 믿는 것은, 혹은 그가 목격한 윌의 행위를 자신에게 말해보라고 권유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심정을 윌 또한 알고 있으리라는 가정하에 이루어진다. 월터는 윌이 모든 사항을 ‘안다고 가정한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 알고 있는 우리, 이제 우리는 같은 처지가 되었군.” 월터는 윌에게 우정 또는 동맹의 형태로 죄의식을 전이시키고자 한다. 그는 스스로를 능동적인 피분석자의 위치로 놓고, 윌에게 분석가의 역할을 맡긴다. 그러므로 그가 살인경위를 고백한 뒤에 윌에게 건네는 말은 서로의 의자를 바꿔 앉자는 말이다. 우연히 저질러진 살인(월터의 주장에 의한다면), 잠 못 이루는 불면증의 고통은 월터가 윌에게서 느끼는 공통점이다. 심지어 윌은 월터에게 이상적 동일시의 대상이기까지 하다. 자신도 예전에 경찰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털어놓는 월터의 말을 새겨들어야 한다.
월터는 죄인 이전에 환자에 가깝다(<쎄븐>의 살인마와는 다르게 자신의 죄의식을 느끼고 있는). 또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에 죄의식의 전이 과정을 시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 그렇기 때문에 털어놓고 나니 시원하다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윌의 입장은 다르다. 그는 환자, 내지는 피분석자가 아니며, 오히려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기고 있다. 또한, 월터의 말을 들어줄 만큼 분석가의 위치에 놓여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월터를 향한 역전이는 일어날 수가 없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치료를 위한 (역)전이의 과정이 아니라 죄를 사할 수 있는 ‘고해성사’여야 하는 것이다. 윌이 월터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한 채, 호텔 여주인 레이첼에게 과거의 행적을 고백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I don’t know any more.”
용서받고자 하는 그의 죄는 그의 윤리적 확신에서 비롯된다. 윌에게는 일종의 스스로가 부여한 정언명령들이 있는데, 모든 정언명령들이 그렇듯이, 그의 가설적 정언명령은 위장된 범주적 정언명령의 모습을 띠며 나타난다. 그리고 윌에게 있어서 죄는 그것을 억지로 이행하려는 순간 모순된 형태로서 일어나게 된다. ‘악인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윌의 범주적 정언명령은 ‘법의 망을 피해가는 악인을 처벌하려면, 그 법을 위반해야만 한다’는 다른 가설적 정언명령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교묘하게 법을 피해간 살인자를 처벌하기 위해 일부러 증거물을 만들어놓은 윌의 행위는 햅과 윌에 대한 내사과의 조사를 불러들이게 되고, 햅과 윌 사이의 관계를 망가뜨리고, 다시 햅을 죽이게 되는 죄를 촉발시킨다. 밤인데도 낮인 밝음은,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불면증은, 법을 지키기 위해 법을 위반하는,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고통받는 윌의 심경에 대한 반영이다. 위반함으로써 세운 정의는, 윌에게 고통스럽게 밝은 것, 그 이상의 결과가 아닌 것이다.
스릴러라는 장르적 명목에 충실하기 위해 윌과 월터가 벌이는 협박과 거래의 긴장감은, 전이와 고해성사의 과정 속에서 내러티브 전개를 위한 요소로 남게 된다. 물론 이것만을 즐긴다해도 나쁠 건 없다. 하지만 이것만 문제삼으면 이 영화는 질질 끄는 영화가 된다는 사실도 잊지 않아야 한다. <메멘토>와 <인썸니아>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이 영화에 부여하는 명제는 ‘그 모든 확신이 불확실성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몸에 새겨진 문신의 사실들을 따라 끝없이 오류추론을 반복하는 <메멘토>의 레너드는 진실을 ‘알고 있다는 확신’에 차 있다. 위장된 범주적 정언명령을 따라 죄를 범하고, 그 죄로 죄의식에 빠지는 윌은 법을 ‘지켜야 한다(법을 어겨야 한다)는 확신’에 차 있다. 그러나 이 둘이 도달하는 상태는 결국 이런 것이다. “I don’t know any more.” 적어도 지금까지 그래왔듯, 크리스토퍼 놀란이 그의 영화 속에서 다루고자 하는 인물들이 병자와 죄인들이라면, 우리는 앞으로도 그들 사이의 복잡 미묘한 (불)확신의 드라마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정사헌/ 영화평론가 taogi@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