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이야기 <메모리즈> 감독 김지운
2002-08-16
˝건조하게,차갑고 건조하게˝
세련되고 청결한 거실. 그러나 방 안에 괸 공기는 소리없이 흐느낀다. 모로 누워 잠든 남자의 목을 조르듯 느리게 기어가는 트래킹 숏으로 삐거덕 문을 여는 김지운 감독의 <메모리즈>는 어느 아내와 남편이 경험하는 몹시 피곤한 하루의 기록. 신도시의 아파트에 보금자리를 꾸민 성민은 불길한 예감을 안고 갑자기 사라진 아내를 찾아다니나, 그녀가 실종되기 전후의 기억이 희미하다. 한편 인적 드문 신도시 길목에서 기억을 잃은 채 깨어난 성민의 아내는 지갑 속 세탁전표 하나를 단서로 온 길을 되짚어간다.“상업적 지향이 없는 프로젝트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다른 두 감독이 찍은 걸 보니 나 혼자 잘못 안 거 아닌가 싶더라구요.” 짐짓 난감한 척하는 김지운 감독에게, <쓰리>는 장편영화의 흥행 부담을 살며시 벗어두고, 호러 장르의 공법을 진지하게 시험한 실험실이자 놀이터였다. 첫 번째 장편 호러를 구상하고 있던 2000년 <쓰리>의 트리오에 가담할 것을 제안받은 김지운 감독은 <메모리즈>를 “일단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 극히 건조한 스타일로 만든 공포영화”라고 소개한다. 대단히 말없는 영화다.→의도적으로 대사를 줄인 것이 아니라, 분위기 속에 잠기다보니 저절로 말이 없어졌다. 삭막하고 황량한 신도시 풍경이 주인공 부부의 내면 풍경이기도 하니까.<메모리즈>는 <해피엔드>의 마지막 부분만 떼어낸 것 같은 내용이다.→처음에는 아내가 영화에 나온 사진 속 남자와 벌인 애정행각과 관련된 내용이 있었다. 그러나 <해피엔드>의 호러 버전을 시도한 것도 아니고, 사건의 원인을 치정에 돌리면 영화를 통해 드러내려 한 메시지가 곡해되고 가려질 것 같아서 걷어냈다. <메모리즈>는 모델하우스의 실내장식에 넋을 잃은 젊은 부부들의 얼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그 꿈을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그들이 감내할 끔찍한 현실, 균열과 상실을 생각했다. 서울에서 원하는 수준의 소비를 즐길 수 없는 경제력을 지닌 사람들은 신도시의 시뮬레이션 속에서 위안을 얻지만 소녀가 죽은 터에 아파트가 세워지고 아이들이 살벌한 건축 자재 더미 옆으로 등하교하는 영화 속 장면에서 보듯, 신도시는 간절히 행복을 추구하나 행복에 대한 근본적 위협을 품고 있는 공간이다.왜 <메모리즈>라고 부르기로 했나.→영화 속의 여자는 기억을 잃어버린 공포에 맞서 안간힘을 쓰지만 기억이 하나하나 복원되는 과정에서 더 큰 공포를 맛본다. 반면 남자는 기억을 조작하면서까지 떨쳐내려 하지만 그의 기억은 악몽으로 살아나 발목을 잡는다. 이같은 아이러니와 더불어 신도시는 누군가의 기억을 훼손한 위에 서 있는 공간이라는 뜻도 담고 싶었다.모든 프레임이 공포효과를 겨냥해 바짝 긴장된 느낌이다.→전에 말했듯 <메모리즈>를 가장 잘 표현하는 형용사는 ‘건조한’이다. 내가 극히 건조한 인간이 되다보니 잘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제작자이기도 한 진가신 감독은 차고 건조한 내 영화가 깎아먹은 걸 상쇄하려고 본인의 에피소드에 뮤직비디오적인 감수성을 강화한 것도 같다. (웃음) 재미있는 점이 <메모리즈>와 <고잉 홈>이 유사한 소재를 하나는 아주 건조하게 하나는 아주 따뜻하게 다뤘다는 점이다.여자가 머리를 후비는 장면의 움직임이 대단히 독특한데 어떻게 만들었나? 유난히 파란 하늘은 컴퓨터가 그렸나.→귀신의 동작은 뭔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CG는 너무 인위적일 것 같아서 낱개의 프레임을 군데군데 들어내는 아주 아날로그적인 기교를 썼다. 마지막 장면에는 CG로 붉은 하늘을 집어넣으려다 오히려 CG로는 선명함이 죽어 자연의 하늘을 촬영했는데 <반지의 제왕>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 부럽지 않은 그림 같은 하늘을 촬영하는 행운을 누렸다.일부 장면이 미이케 다카시의 영화를 연상시킨다.→롱테이크로 집중력이 고조된 도입부에서 <오디션>과 비슷한 인물의 움직임이 나와 더 강한 인상을 남긴 것 같다. <오디션>을 재미있게 보긴 했지만 이상한 소리와 태도, 정체불명의 소지품 등은 어차피 공포영화가 공유하는 컨벤션 아닌가 싶다.미술과 음악에 대한 주문은.→정구호의 청결하고 세련된 공간이 어느 순간 공포스럽게 바뀌는 모멘트, 이병우의 서정적 음악이 어느 순간 스산하고 음울해지는 모멘트가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색다른 변신을 주문한 것이 아니라 정서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면서 그들이 가장 잘하는 작업을 배치할 이질적인 맥락을 마련했다.보통의 옴니버스영화는 공간이나 화자, 소품이 연결고리 역을 하지만 <쓰리>는 제목부터 공통의 컨셉이 없다. 결과적으로 발견하는 접점이 있다면.→진가신 감독이 프로듀서인 만큼 감독의 자유를 최대화했다. 우리도 바보가 아닌 이상 공동 컨셉에 대한 궁리를 많이 하긴 했다. (웃음) 그러나 모였다 하면 4개 국어가 난무하다보니 누군가 화제를 던지면 이내 아비규환이 되고 그러다 제풀에 지쳐서 결론을 끌어내기가 불가능했다. (웃음) 이번처럼 (바벨탑에서 인간의 언어를 분열시킨) 신을 원망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결국 세편 모두 가족, 집단, 공동체의 파괴와 회복을 이야기하는 호러로 완성된 것 같다.장편 호러 구상 중에 <메모리즈> <장화, 홍련>을 외부에서 제안받아 작업하고 있으니 공포영화 한편의 소재가 수중에 고스란히 남아 있을 텐데.→<악마를 찾아내는 34가지 방법>이라는 제목만 있다. 주변에서 악마를 색출하는 34가지 방법을 영화적으로 보여주면 재미있지 않을까? 말하자면 <맨 인 블랙>의 호러판처럼.글 김혜리 vermeer@hani.co.kr<<< 이전 페이지기사처음다음 페이지 >>>
1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