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야기를 3개의 언어, 3가지 문화로 담아낸다면 호러, 혹은 미스터리가 최선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내가 호러를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귀신 이야기를 아주 무서워하니까 무서운 느낌의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촬영하면서 촬영분을 보니 전혀 안 무서웠다. 정의할 순 없지만, 잠재의식 속에서 감독으로서 나에게 더 편한 영역을 찾아가려고 한 것 같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미스터리, 중국 의학, 미신 등 호러적인 요소가 더 많고, 감정적인 드라마가 적었다. 하지만 내가 흥미를 느낀 것은 과연 아내가 살아날 것인가가 아니라 남편의 집착이었다. 처음에 호러로 찍었다가도 편집하면서 많이 잘라냈고, 결국 인간관계에 대한 영화로 남은 것 같다.폐허 같은 아파트, 죽은 아내의 부활을 기다리는 중국 출신의 의사 등의 설정에서 홍콩의 현재에 대한 은유를 읽어낼 수도 있을 것 같다.→내 영화에서 상징이란 영화를 만들기 전이 아니라 완성한 다음에 생긴다.(웃음) 이렇게 기자들과 얘기하다보면. 잠재의식적으로는 홍콩과 중국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 위는 현재면서도 다른 시간대, 다른 공간인 것 같은 느낌, 초현실적인 분위기가 필요해서 관객이 잘 모르는 곳에서 온 사람으로 설정했다. 그렇다, 일종의 상징이긴 하다. 다르게 받아들여도 상관없지만, 결국 과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얘기다. 낡은 집, 죽은 아내에 집착하는 위처럼, 홍콩 사람들은 과거에 집착하며 미래를 보지 않는다. 10년 전 얼마나 대단했는지가 무슨 의미가 있나. 이젠 그만 깨어나서 더이상 대단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 앞을 봐야 한다.신작 <웨이팅>은 어떻게 돼가고 있나. 또 다른 계획이 있다면.→<웨이팅>은 지난해에 시나리오를 끝내고 투자와 배급을 물색해왔다. 예산이 1800만달러 정도로 좀 커서 할리우드에서 투자를 받되, 제작은 어플로즈에서 관할하면서 3월쯤 시작할 예정이다. 그 밖에 팡 형제의 차기작으로 연쇄살인 스릴러와 <디 아이2>, 창녀의 삶과 매춘을 다룬 <골든 치킨>, <십이야>의 감독 임애화의 새 러브스토리 등을 제작한다.글 황혜림 blauex@hani.co.kr·사진 손홍주 lightson@hani.co.kr<<< 이전 페이지기사처음다음 페이지 >>>
세 번째 이야기 <고잉 홈>의 진가신
2002-08-16
과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얘기
만날 듯 스쳐 지나며 세월의 먼길을 돌아 마주하는 남녀의 인연을 섬세하게 그려냈던 손길로 빚은 공포는 어떤 빛깔일까. <금지옥엽> 1, 2편과 <첨밀밀> <러브레터> 등 멜로드라마의 고운 감수성으로 알려진 진가신 감독이 공포를 키워드로 불러낸 <고잉 홈>은 결코 노골적인 공포영화가 아니다. 다들 떠나갈 뿐 더이상 입주해 오지 않는 황량한 아파트, 어두운 복도에 텅 빈 집집의 문짝들만 이따금 삐걱대는 폐허 같은 공간에서 신경이 곤두서는 불안을 감지할 순 있겠지만. 그 아파트에 이사온 며칠 뒤 사라져버린 아들의 행방을 쫓던 경찰 천은, 거의 유일한 이웃으로 세상과 담쌓은 채 병든 아내만 돌보며 산다는 한의사 위를 의심한다. 하지만 위의 집에 잠입한 천이 발견하는 것은 아들의 흔적이 아니라, 죽은 아내가 되살아나리란 믿음으로 3년간 정성껏 시체를 보살펴온 남자의 기이한 집착이다. 언뜻 공포스러울 법도 한 설정이지만, 매일같이 시체를 한약재로 씻기고 단장해가며 부활을 기다리는 위의 집착은 오히려 처연하리만큼 애틋한 사랑의 잔향을 머금고 있다. 99년작 <러브레터>로 할리우드를 경험한 이후, 진가신은 어플로즈픽처스를 설립하고 <잔다라> <디 아이> 등 제작자로 더 활발한 활동을 벌여왔다. 오랜만에 연출로 돌아온 계기는, 합작을 통한 아시아 영화시장의 공유 및 확장이라는 어플로즈의 목표와 상통한다. “세 나라의 다른 언어와 문화에 기반한 영화로 아시아 영화시장 사이에 존재하는 갭을 메우고, 다리를 놓기 위한” <쓰리>의 시도는, 진가신이 보는 아시아영화의 미래이기도 하다.<러브레터> 이후 제작은 꾸준히 해왔지만, 연출은 오랜만이다.→어플로즈픽처스를 운영하며 다른 일들로 바빴다. 그래서 <쓰리>도 셋 중에 제일 늦게 찍었고. 영화 한편을 하려면 몇년은 집중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었다. <고잉 홈>은 단편이니까 가능했다. 회사를 운영하고, 틈틈이 미국 소설에 바탕한 새 영화 <웨이팅>을 기획하는 그동안은 나에게 과도기였다. 나 자신을 재발견하고, 새로운 단계로 옮겨가기 시작했달까. <첨밀밀> 이후 난 더이상 내 영화에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과거에는 관객보다 내가 더 내 영화에 흥분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안 해 본 것을 하고 싶어서 할리우드로 가서 <러브레터>를 찍고, 어플로즈도 만들었다. 타이, 한국 같은 나라와 그곳 사람들을 좋아했고, 그에 대한 영화를 하고 싶었다. 여전히 연출이 최우선이지만, 다시 연출을 하기 위해선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야만 했다.홍콩 감독으로서 변화하는 현재의 홍콩에 대해 더이상 얘기할 게 없어서 연출을 쉬었다고 했는데. →그렇다. 과거 홍콩은 아시아의 트렌드 리더였고, 영화의, 팝스타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 무엇도 아니다. 2∼3년간 모든 게 급격히 쇠락했다. 스스로 기민하고, 빠르고, 유능하다고 생각했던 홍콩 사람들은 갑자기 더이상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나라를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자신이 누구인지, 지금까지의 정체성을 잃고 다시 찾아가는 과정이다. 홍콩에 대해 남은 느낌이 있다면 그것뿐인데, 뭔가 다른 것을 찾기 전까진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아마 그래서 외부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첨밀밀> 같은 멜로드라마로 잘 알려져 있는데, 호러 색채가 있는 영화를 하니 어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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