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8월9일부터 11일까지 일본 빅사이트에서 열린 ‘코믹마켓 62’에 모인 마니아들 사이에는 예전과는 다른 분위기가 흘렀다. 이곳에서 거래되는 각종 동인지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상당수를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대회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일반용이나 야오이, 성인용을 모두 포함). 1996년 스톡홀름에서 열린 ‘아동의 상업적 착취에 반대하는 회의’에서 동남아 어린이 성매매의 주범으로 비난받은 일본은 1995년 5월 가결, 같은 해 11월부터 실시된 ‘아동 매춘, 아동 포르노 금지법안’을 시행해왔다. 원조교제나 어린이 누드사진들의 규제수단으로 쓰인 이 법은 올해 11월 개정될 예정인데, 그 개정 내용에 ‘그림’의 부분이 포함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계는 큰 혼란에 빠져 있는 상태다. 이 법에서 ‘아동’이라 칭하는 기준은 ‘18세 미만인 자’로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아동’ 및 ‘청소년’의 범위를 포괄하고 있다. 이 법에 따르면 ‘18세 미만 또는 설정상 18세 이상이라도 18세 미만으로 여겨지는 등장인물을 성적 자극이 일어날 수 있도록 묘사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처럼 보인다’, ‘시각적으로 성적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등의 주관적 판단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기준에 착실히 따르게 된다면 일본 만화, 애니, 게임 캐릭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어려 보이고 미형(美形)인 캐릭터의 누드나 성교장면은 물론이거니와 목욕이나 속옷 차림도 규제대상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이 법에서 정하고 있는 처벌 대상에서는 그러한 그림이 들어간 물건의 신품 및 중고 판매는 물론 제작, 운송, 상영, 수출, 수입, 소지하고 있는 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마니아는 물론 출판사, 인쇄사, 비디오 판매사, 제작사 등의 전반이 그 영향권에 들어가게 된다. 엄격하게 적용된다면 거의 대부분의 일본 만화, 애니 작품이 해당될 수밖에 없는 이 조건하에서는 대히트작이랄 수 있는 <드래곤 볼>이나 <도라에몽> <요술공주 밍키>는 물론 <이웃의 토토로> 같은 작품도 걸릴 수 있을 것이다(두 여자아이의 목욕신이 나오므로).
오는 8월23일경 일본에서 비디오와 DVD로 출시될 <신세기 크림레몬 시리즈-아미 Rencontrer>도 마찬가지. 80년대 일본 성인애니메이션의 여명기를 개척한 <크림레몬> 시리즈 중 최대 히트작인 <아미>(1기 3부작, 2기 4부작, 나중에 총집편까지 나올 정도의 당시로서는 빅히트작)를 리메이크한 이 작품은 과거 시리즈의 영광을 다시 살리려는 듯, CG 기술의 도입 이후 전반적인 질의 저하가 두드러지는 여타의 성인애니메이션에 비해 상당히 높은 퀄리티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전작들을 거치며 이미 성인이 된 주인공 ‘아미’가 다시 초기작의 어린 시절 모습으로 돌아가버린 캐릭터 디자인에서 일본 성인애니메이션의 마지막 불꽃을 느끼는 이는 나 혼자만이 아닐 것 같다. 일본의 포르노문화는 성기 노출을 자제하는 대신 내용에 관한 최대한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SM 등과 같은 변태적인 부분만 발달하는 악영향을 불러일으켰다. 18세 미만인 캐릭터를 규제하게 되면 직장여성이나 유부녀와 같은 층이 일본 성문화의 타깃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린이를 학대하거나 성적 수단으로 삼는 것는 물론 없어져야 할 일임에 분명하지만 포괄적이고 임의적인 기준의 법으로 문화를 통제하려는 것 역시 수많은 부작용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 올해 말이 되면 일본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절반 이상은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지도 모른다. 김세준/ 만화·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neoeva@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