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화평론가가 아니라는 것, 따라서 이 난이 본격적인 영화 비평의 마당이 아니라는 것에 나는 늘 안도한다. 아마추어 관객이 영화에 대해 얘기할 때, 그는 직업적 영화평론가보다 더 많은 ‘언론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난에서 하는 말에 내가 책임감을, 중압감을 덜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직업적 영화평론가라면, 내 말이 관객이나 영화계에 끼칠 영향을 가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또 내심 평론가로서의 내 성가에 끼칠 영향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를 세심하게 재며 키보드 위의 손가락 놀림을 조율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런 무거운 짐을 진 영화평론가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과감한 말도 할 수 있다.
나는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가 우리 영화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열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오아시스> 이후 한국 영화는 이제 예전과는 다른 기준점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하는 순간, 혹시 같은 감독의 <박하사탕>이 더 뛰어난 영화가 아니었나 하는 또 다른 나의 항의가 들려온다. 아닌게아니라 내가 만약 <박하사탕>을 스크린에서 보았다면, 한국 영화의 새로운 페이지에 대한 예감은 그때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쉽게도 그 영화를 19인치 브라운관을 통해 비디오로 보았다. 그래서 대형 스크린이 주는 덤의 감동을 누릴 수가 없었다. 내 시네마천국에서 <박하사탕>은 <오아시스>보다 운이 나빴던 셈이다. 이 난을 맡은 뒤 의무적으로 보게 된 영화 가운데서 나는 얼마 전까지 <파이란>을 엄지로 꼽고 있었다. 이제 그 영화를 집게손가락 몫으로 밀어놓아야 할 것 같다.
아마추어 관객으로서, 나는 이창동씨를 한국의 에미르 쿠스투리차라고 생각한다. 아니, 쿠스투리차를 발칸의 이창동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 다 과작의 연출가이지만, 그 대신 태작을 내놓는 법이 없다. 그들은 인간 세상의 너절함과 비루함을 너절하지도 비루하지도 않게 그릴 줄 안다. 그것은 재능만이 아니라 온힘을 다하는 성실에도 기인하는 것일 터이다. 하기야 성실도 재능이다. 이창동씨와 쿠스투리차는 또 나이도 비슷하다. 비록 이창동씨의 데뷔가 많이 늦었지만. 그러고 보면 이 두 감독은 내가 그들의 작품을 (일부는 비디오를 통해서지만) 모두 보았다는 공통점도 있다. 아마추어 관객으로서 나는 또 지극히 세속적으로 이런 얘기도 과감히 하고 싶다. <오아시스>가 올해 베네치아 영화제에 출품되었다고 한다. 나는 <오아시스>가 황금사자상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가 <하나비>나 <귀주이야기>에 견주어 조금도 못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오아시스>가 베네치아에서 아무 상도 받지 못한다고 해도 역시 조금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월드컵에서의 굴욕적 패배를 아직도 못 잊는 이탈리아인들의 속좁음이나, 고개가 오른쪽으로 고정돼버린 베를루스코니 정권의 몰취향을 증명해줄 뿐이기 때문이다.
이창동씨는 배우 운도 좋았다. 홍종두와 한공주 두 주인공 역을 맡은 설경구씨와 문소리씨의 연기도 나무랄 데 없었지만, 내게는 홍종두의 형수 역을 맡은 추귀정씨와 한공주의 올케 역을 맡은 윤가현씨의 연기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적당히 모질면서 적당히 어진 보통 사람들의 내면과 행태는 그 두 배우의 연기 속에 너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나는 한 순간 그들이 영화 속 인물이 아니라 <인간 시대>류의 휴먼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실존 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오아시스>는 계몽영화가 아니라 사랑의 이야기, 특별한 사랑의 이야기다. 장애인 문제는 이 사랑의 배음(背音)일 뿐이다. 그러나 그 배음이 환기시키는 인간 사회의 가혹한 너절함에 대범할 수 있는 관객이 많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아시스>는 계몽을 의도하지 않은 계몽영화인지도 모른다. 시나리오를 직접 쓴 이창동 감독은 마지막 부분의 반전을 제외하고는 어떤 종류의 온정주의에도 빠지지 않은 채 잔인하다싶을 만큼 차가운 시선으로 이 특별한 사랑의 추이를 좇는다. 어느 순간, 스크린에 눈을 고정시키기가 힘들었다. 나는 잠시 내 옆자리에 장애인이 앉아 있다고 상상해보았고, 내가 장애인이라고 상상해보았다. 그럴 때 이 영화의 어떤 장면들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문소리씨의 연기가 오래 계속될 때, 나는 또 문득 이 영화가 농담을 해서는 안 될 순간에 농담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경직된 윤리적 의구심도 가졌다. 그러나 나는 이내 그 생각을 지웠다. 장애인 문제는 이 영화의 주제가 아니라 소재다. 그것을 주제가 아니라 소재로 고른 것을 두고 연출자를 탓할 수는 없다. 이창동씨는 자신이 설정한 틀 안에서, 더러 불편함을 주는, 그러나 서늘하게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는 적어도 장애인을, 장애인의 삶을 스크린으로 데려왔다. 그 장애인을 객석으로(이 영화의 관람석으로만이 아니라 모든 극장의 객석으로), 거리로, 광장으로 데려오는 것은 비장애인들 모두의 몫이다.고종석/ 자유기고가 aromach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