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치게 내성적이고 컴퓨터엔 별 관심도 없는 15살짜리 여중생 이와쿠라 레인에게 어느날 메일이 날아든다. 번잡한 시부야 거리에서 자살한 같은 학교 친구 요모다 치사였다. “난 육체를 버렸을 뿐이야. 내가 아직 살아있음을 알려주고 싶었어.” 그는 ‘와이어드’ 세계(사이버 공간)에서 신을 만났다고 했다. 도대체 내가 지금 있는 곳은 과연 어디일까. 가상일까, 현실일까. 지난 98년 일본에서 방영됐던 애니메이션 <레인>(원제 Serial Experiments:Lain)은 가상과 현실이 혼재된 오늘날 사람들의 정체성에 질문을 던지는 논쟁적 작품이다. 디브이디, 게임 등으로 제작돼 일본·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이 작품의 전체 에피소드 13편이 오는 20일께 국내에도 5장짜리 디브이디로 출시된다. 지난해 투니버스에서 방영됐지만 심야시간에 편성돼 아쉬움을 남겼다. <레인>은 흔히 일본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나 <공각기동대>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레인>의 매력은, 그럴 법한 미래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두 작품에 비해 ‘오늘, 현재의 시간’에서 출발한다는 데 있다. 아빠는 “성인의 성숙한 커뮤니케이션엔 고도의 기계가 필요하지”라며 컴퓨터에만 빠져살고, 이상할 정도로 차가운 엄마는 자식들의 어떤 일에도 무관심하며 언니는 수다스럽기만 하다. 레인은 집에 들어오면 곰돌이 옷을 뒤집어 쓰고 지내며 마치 사회적 성장을 거부하는 아이처럼 자폐적 모습까지 보인다. 분절된 레인의 가족관계는 분명 현실(이거나 가까운 현실)이기에 더욱 섬뜩하다. 자살한 친구의 메일을 받은 뒤 레인은 ‘나비’(음성인식의 피시)를 통해 와이어드 세계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동시에 ‘사이버리아’라는 록클럽에는 레인과 똑같이 생긴 소녀가 출현한다. 현실의 레인과 정반대로 강하고 영악해 보이는 친구다. 이 또다른 레인을 추적하며 레인은 와이어드에 신이 있다고 믿는 비밀결사단 ‘나이츠’와 접촉하고, 신을 자처하는 이와 만나게 된다. 움직임과 음악을 극히 자제한 <레인>의 스타일은 무척 독특하다. 일상의 웅얼거림이나 가전제품에서 낮게 들리는 전류의 소리만 작게 들릴 뿐이며, 대사는 극히 적다. 형광등 빛같이 눈부신 흰 배경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타이포그라피를 이용한 대사 전달, 느린 화면전개 등 실험성이 가득하다. 게다가 낯선 신조어들도 적잖게 등장하고 막판까지 해답을 가르쳐주지 않는 이 작품의 스토리를 따라가기란 녹록치 않다.하지만 <레인>의 잔상은 짙고도 오래간다. 마침내 하나의 프로그램에 불과한 레인의 정체가 밝혀질 때,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듯 하다. 당신은 어디에 서 있지. [DVD 정보] 감독 나카무라 류타로/화면 4:3 FULL SCREEN /오디오 Dolby Digital 2.0/더빙 한국어,일본어 /자막 한국어 /지역코드 3/출시사 마니아 엔터테인먼트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