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소란스런 B급 드랙퀸 쇼가 `영화 <헤드윅>`으로 태어나기까지(1)
문석 2002-08-10

그/녀의 가발에 꽃을 던져라!

1994년 7월29일 밤, 미국 뉴욕 소호의 유명한 드랙퀸 클럽 ‘스퀴즈박스’는 일순 조용해졌다. 스스로를 야시시한 여성 모습으로 치장한 남성, 즉 드랙퀸들이 록음악을 고래고래 불러댔던 이 클럽 무대에 자신을 미군 병사와 결혼한 독일인 여성인 헤드윅이라고 소개하는 한 드랙퀸이 등장했던 것. 그저 목청이 터져라 꽥꽥거리며 좌중의 흥을 돋웠던 다른 드랙퀸들과 달리, 그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처럼 자신에 관한 이런저런 농담을 던졌고,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이야기를 노래로 불렀다. 그리곤 다시 격렬한 노래를 열창하며, 가발을 벗어던지고 옷을 북북 찢었으며, 브래지어도 벗어 찢어버렸다. 하지만 이 새로운 형식의 드랙퀸 쇼에 관객이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던 그날 밤이 록뮤지컬, 그리고 >록뮤지컬영화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헤드윅>(Hedwig and the Angry Inch)이라는 제목의 록뮤지컬과 록뮤지컬영화의 출발점이었다. 이 작지만 소란스러웠던 드랙퀸 공연은 4년 뒤인 98년 이야기와 음악이라는 살이 붙은 채 오프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공연됐고, 2001년에는 마침내 영화로 탈바꿈하게 됐다. 깜짝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둔 것은 마니아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뮤지컬 공연이나 선댄스영화제에서 감독상과 관객상, 베를린영화제에서 테디 베어상 등을 수상했으며, <롤링스톤>의 피터 트래버스로부터 ‘최고의 록영화’ 10위로 손꼽혔던 이 영화만이 아니었다. 이 작품의 주연이자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였던 존 카메론 미첼 또한, 어떤 이유에서건 주목해야 할 감독 중 한명으로 떠올랐다. 비단 동성애자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패배자들과 마이너리티들에게 상쾌한 용기를 불어넣어준 그는 지난해 <롤링스톤>이 뽑은 ‘올해의 인물’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그럼 이제 신데렐라 이야기의 드랙퀸 버전으로 보이기도 하는 <헤드윅>의 성공담 속으로 들어가보자.(한가지 당부. 이 글은 가능하다면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헤드윅>을 본 뒤 읽어주시길.)-편집자 주

만약 당신이 <헤드윅>을 보고 어떤 진정성을 느꼈다면, 이를 이상한 일로 여길 필요는 없다. 그건 각본, 연출, 주연을 맡은 존 카메론 미첼과 모든 음악을 만들었고 밴드 ‘앵그리 인치’의 멤버로도 출연하는 스티븐 트래스크의 인생 그 자체가 필름 위에 낀 막처럼 끈적하게 묻어 있는 탓이므로. 그리고 그것을 당신이 흡수했다는 얘기이므로.

물론 그건 1994년의 어느 날, 미첼이 LA에서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트래스크를 만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파스빈더의 책을 읽는 것을 보니, 혹시 영화쪽 일을 하시나요?” 미첼은 그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은 트래스크에게 질문을 던졌고, 이를 계기로 둘은 음악과 영화, 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됐다. 비행기에서 내린 둘은 금세 헤어졌지만, 이 첫 만남은 둘의 삶을 바꿔놓을 두 번째 만남을 위한 일종의 전초전이었다.

태동 - 드랙퀸 클럽, 혹은 보모/창녀

몇달 뒤 자신의 남자친구인 잭 슬랙이 한 밴드의 베이시스트로 활동하고 있다는 한 클럽을 찾았을 때, 미첼은 ‘치터’라는 이름의 이 밴드의 리더가 바로 트래스크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스퀴즈박스’라는 이 클럽은 당시 뉴욕에서 꽤나 인기를 얻고 있었던 드랙퀸 클럽이었다. 1990년대 초·중반, 뉴욕 다운타운의 드랙문화는 게이들만의 축제에서 차츰 주류를 향해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뉴욕의 작가, 예술인들(이성애자들도)이 드랙 공연을 보기 위해 클럽을 찾았고, 드랙 공연자였던 루폴(RuPaul)은 아예 인기가수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와 함께 드랙의 스타일도 변화했다. 그전까지는 여성적인 음악을 립싱크하는 형태의 쇼가 양식화됐었지만, 그때부터는 드랙퀸들이 록음악을 실제 육성으로 부르는 형태로변화하기 시작했다. 치터는 이런 분위기를 이끌고 있던 클럽인 스퀴즈박스의 하우스 밴드였고, 리더인 트래스크는 이 클럽의 음악감독이기도 했다.

동성애자였지만 동성애 커뮤니티에는 속하지 않았던 미첼은 이날 처음 본 드랙퀸 공연에서 묘한 흥분을 느끼게 되고, 트래스크에게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헤드윅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공연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와 트래스크는 동베를린에서 미군을 따라 캔자스로 건너온 기구한 운명의 한 성전환자에 관한 이야기와 음악을 만들어냈다. 미첼은 트래스크에게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를 들려준 뒤 이를 바탕으로 노래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한다. 태초에 남성, 여성, 그리고 두 가지 성이 함께 존재하는 양성이 있었지만 인간의 오만불손을 참지 못한 신에 의해 둘로 갈라졌다는, 그래서 이들은 ‘잃어버린 반쪽’을 그리워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담은 <오리진 오브 러브>(Origin of Love)가 이 곡이다.

1994년 7월29일 스퀴즈박스에서 미첼은 헤드윅으로서 첫 무대를 가졌다. 이 공연은 이후 7년 동안 이어지는 헤드윅으로서의 미첼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는 헤드윅의 기구한 운명에 관해 질겅질겅 이야기했고, <헤드윅>에서 가장 중요한 노래라 할 수 있는 이 곡을 불러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30분 동안 치러진 그 공연은 파격적이며 인상적이었다. 어떤 드랙퀸은 “진짜 드랙퀸도 아닌 가짜에게 저렇게 많은 시간을 주다니…”라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공연이 거듭되면서 관객은 시간을 좀더 늘려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미첼이 타고난 드랙퀸이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 호흡을 맞췄을 때 밴드 멤버들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배우 출신인 그가 비브라토 창법을 쓰는 것을 듣곤, “당신 그 창법으로 록음악을 부르려고?”라며 황당해했다. 어찌됐건 헤드윅은 파워풀한 무대였고, 많은 환호를 받았다. 당시 이 클럽 최고의 스타였던 ‘미스트리스 포미카’(마이클 오르테가라는 본명을 가진)는 미첼에게 수염을 깎지 않고 매끈한 분장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쳤고, 셰리 바인이라는 드랙퀸은 타이트한 벨트로 ‘거기’를 조여 좀더 맵시있게 보이는 수단을 알려주기도 했다.

사실, 미첼이 이 공연을 구상할 때 주인공 캐릭터는 헤드윅이 아니라 그에게서 음악적 재능을 전수받고, 나중에 이를 가로채는 소년 토미였다. 캔자스의 정션 시티에 사는 미군 장성의 아들이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자신의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극중 토미의 모습은 그의 10대 때 삶을 그대로 거울에 비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결국엔 “드랙퀸 공연이니 당연히 여성이 나서야…”라는 트래스크의 조언으로 헤드윅을 중심인물로 삼게 되지만.

ORIGIN OF LOVE

전에 당신을 봤을 땐 갈라지고 난 바로 뒤너무도 낯익은 얼굴이었지만 얼굴에 피가 묻어 알아볼 수 없었어하나 난 이것만은 알 수 있었어 당신 영혼의 고통은 내 고통과 같다는 걸…그것은 고통… 심장까지 가르는… 그건 바로… 사랑이란 고통우린 서로를 감싸주고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 사랑을 나누고, 또 나누네그건 먼 옛날 어둡고 추운 밤에 전능한 신의 손에 의해 일어난 슬픈 얘기우리가 어떻게 외로운 두발 동물이 되었는지… 사랑의 기원에 관한 얘기...그게 바로 사랑의 기원

ANGRY INCH

성전환 수술은 실패했지 내 수호천사는 졸고 있었어내게 남은 것은 바비 인형의 가랑이 뿐수술에서 깨어나니 피 흘리고 있었지다리 사이의 피를 본 게 여성으로서 첫째 날, 벌써 생리였나? 이틀 뒤 구멍은 막히고 상처는 아물어 살점 1인치만 남았어 페니스가 있던 곳에 질은 없고 1인치의 살점만 남았어난 성난 1인치! 6인치 빼기 5인치!밤이 될 때까지 숨어 있어야 해난 1인치로 공격준비 끝 난 성난 1인치!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