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 90년대의 말에, 이창동 감독은 그들 광주의 전사 또는 광주의 피해자라는 대세에
몸을 의탁하지 않고 가해자인 진압군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건 좀 뜻밖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대부분은 침묵하는 다수가 됨으로써
광범한 가해자 그룹에 속해 있었던 게 아닐까.
영호가 진압군으로 광주에 갔을 때 나는 학교가 문을 닫았으므로 친구집에 이따금씩 모여 세미나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지금은 국회의원인 한 대학선배가 보자고 해서 동대문 부근의 허름한 다방에서 만났는데, 그는 광주의 상황을 알리는 유인물을 만들 건데 나한테 배포조에 들라고 했다. 아마 집으로 돌아와서 며칠을 고민했던 것 같다. 결국 나는 카프카의 소설들과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 같은 책들을 한보따리 싸들고 낙향해서는 강릉 부근에 있는 삼덕사라는 절로 들어가버렸다. 그런 내가 <박하사탕>을 보았을 때, 내 안에 있는 영호가 기어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여하튼 막동이는 죽었고 영호도 정황으로 보건대 죽은 것으로 사료되는 지금, 오직 <오아시스>의 홍종두만이 살아남았다. 물론 지금 감옥에 있지만. 전과 3범에서 강간 전과 하나가 더 추가돼서 전과 4범이 됐으니 언제 출감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나는 종두가 살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세 남자 중에서 종두에게 제일 마음이 쓰이고 또 연민이 느껴지는 건 그가 이 경쟁사회를 살기엔 너무 경쟁력 없는 인간이라서일지 모른다. 사회성 실조, 목표의식 부재, 자존감 결여의 이 경쟁력 없는 인간에게 세상은 한껏 험하게 굴 텐데.
<오아시스>를 보고나니 나는 자꾸 종두 생각이 난다. 예전에는 무심코 지나쳤을 어떤 장면에서 공연히 종두 생각이 나서 쉽게 발을 떼지 못한 채 머뭇거리게 될지 모른다. 어떤 남자가 한겨울에 반팔 남방을 입고 코를 훌지럭거리면서 버스정류장에서 서성댈 때, 자장면을 배달하러 와서 음식을 다 내려놓고도 괜히 미적거리면서 철가방을 든 채 우리 판을 기웃거릴 때, 영화 찍는 것 구경하겠다고 따라붙다가 오토바이를 탄 채 길바닥에 나동그라질 때, 무전취식하고 식당에 신발을 벗어준 뒤 맨발로 파출소에 잡혀갈 때, 길에서 꾀죄죄한 몰골로 담배를 얻은 뒤 비시시 웃으면서 담뱃불도 빌리자고 할 때, 나는 그 가운데 종두가 있을지도 몰라서 유심히 그 얼굴을 들여다보게 될 것 같다.
♣ <초록물고기>
3, 천재성의 재료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이창동 감독이 만든 영화의 제목들이다. 같은 이미지를 가진 세개의 제목이다. 그의 영화에는 온갖 비열하고 치사한 사람들이 나오지만 그는 이 사람들을 통해 결국은 초록물고기나 박하사탕이나 오아시스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오아시스는 가장 밝고 낙관적이다. 전작인 <박하사탕>과 비교해봐도 그렇다. 우리가 역사를 생각할 때 무기력해지고 더러 패배의식에 빠지지만, 사람을 하나하나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도 그렇다. 개인에겐 구원이 좀더 가까운 데 있고 정 안 되면 판타지라도 있는 것이다. 역사에는 환상이 없지만 개인에겐 환상이 있다. 세상이 사막이라도 어딘가엔 오아시스가 있다. 심지어 전과자인 남자와 뇌성마비의 여자가 둘이서 손잡고 그 오아시스를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런 얘기들을 만드니, 이창동은 갈 데 없는 이상주의자다. 그런 이상주의자가 영화를 만드는데, 그 영화가 재미있다니! 인물들은 생생하게 살아 있고 그들이 놓인 상황은 너무나 있음직하고 그래서 눈물도 나고 웃음도 나고, 그런 건 뭘까. 이야기꾼으로서 이창동의 힘과 매력은 어디서 오는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프로이트 평전을 쓰면서 뵈르너라는 독일 작가의 말을 따다가 발문을 붙여놓은 걸 봤는데, 이런 문장이다. ‘정직성은 모든 천재성의 원천이다.’ 프로이트 평전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경구다. 인간은 원래 존엄하고 이성적인 존재라고 그렇게 덕담만 하고 있으면 좋을 텐데, 프로이트는 19세기 부르주아사회의 점잔 빼는 사람들 안에 들어 있는 원초적 본능, 그 동물적 본성을 까발기면서 ‘이걸 억누르고 참으니까 노이로제가 생기는 거야’ 하고 말해버렸다. 그래서 처음엔 빈의 정신의학자 그룹에서 왕따당했지만 결국 그는 심리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을 열었다. 정직성이 천재성의 원천이 되기는 학자뿐 아니라 작가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서 어떤 천재성을 발견할 때가 있는데 그 천재성의 재료는 대개 정직성이 아닐까 싶다.
위선을 걷어내고, 덕담을 걷어내고, 자기연민을 걷어내고, 내 밑바닥을 들여다보고 남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게, 작가라고 아무에게나 가능한 건 아니다. 그건 작가로서의 재능인 동시에 정직함이라는 성품이다.
필모그래피가 세개까지 쌓이니 작가가 좀더 잘 보인다. 당대의 역사를 섣불리 기록하려는 태도는 정말 경계해야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이창동이 우리 시대 최고의 리얼리스트인 것 같다.디자인 조현덕 hyun@hani.co.kr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