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오아시스>를 보고 새로 쓴 조선희의 이창동론(1)
2002-08-09

시대가 낳은 리얼리즘, 리얼리즘이 낳은 리얼리스트

드디어 <오아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7월29일 첫 시사회를 가진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는

단번에 격정의 폭우를 쏟아붇는 법없이, 조금씩 젖어들어 마침내 깊은 슬픔과 아련한 희망에 이르는 희귀한 멜로다. 그리고 <초록물고기>와

<박하사탕>과 혈연을 확인케 하는 어쩔 수 없는 이창동의 자식이다. 8월15일 관객과의 해후를 앞두고 조선희 전 편집장이 그를 만나 나눈

긴 이야기와 새로 쓴 이창동론을 싣는다.

편집자

조선희 / 소설가, 전 <씨네21> 편집장

1, 세헤라자데의 운명

작가란 뭘까. 이야기꾼의 운명이란 어떤 것일까. 그건 세헤라자데의 운명과 같은 것은 아닐까.

세헤라자데는 밤마다 흥미진진한 얘기를 꾸며내고 그러는 동안 하루씩 사형집행이 늦춰진다. 원래 왕은 아름다운 여자와 하룻밤씩 자고는

목 매달곤 하는데 세헤라자데의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서 관례를 깬다. 세헤라자데의 입담은 대단하다. 무려 1천일 동안 이야기가

마르지 않았고 왕의 호기심을 붙들어두었다. 이야기의 효과란 강력한 것이다. 여자에게 배신당한 기억 때문에 여자들만 연쇄살인하는

남자라면 마땅히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이 왕은 3년 동안 왕비에게 매일 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편집증이 말끔히

치료가 됐다. 이야기는 왕의 광기를 잠재우고 세헤라자데는 목숨을 건졌다.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라는 책이 있지만,

세헤라자데의 캐치프레이즈는 ‘이야기가 우릴 구원할 거야’다. 이야기가 구원하는 건 이야기꾼만이 아니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처럼 전면적인 해피엔딩은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에드거 앨런 포 같은 위악적인 작가라면 이런 해피엔딩이 참을 수 없었을 만하다. 그는 <천일야화의 천두번째 이야기>라는 짤막한 단편을 썼는데, 여기서는 세헤라자데가 기껏 1천일을 잘 버텨오다가 한번 실수로 결국 죽임을 당한다. 왕은 왕비의 입담에 홀려 있었지만 그것도 3년쯤 되자 싫증이 났던 모양이다. 1천두 번째 밤에 세헤라자데는 신밧드의 황당무계한 세계일주 이야기를 속편으로 풀어놓는데 이 판타지가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왕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소릴 지르면서 날이 밝자마자 왕비를 교수대로 보내버렸다는 것이다. 리얼리티로 치자면 이쪽이 훨씬 그럴싸하다. 기질적으로 타고난 변덕이 어딜 가겠으며,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라 해도 편집증을 그렇게 말끔히 고치기는 쉽지 않다. 세헤라자데는 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고 나와 있다. ‘날 살려주면 아직 할 얘기가 많이 남아 있는데. 그 재미난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버리다니, 왕의 불행이지. 이렇게 죽음으로써 왕한테 복수할 수 있게 됐으니 그나마 다행이군.’

세헤라자데가 현대에 살았다면 어떠했을까. 왕이 없어졌다고 좋아하긴 이르다. 왕 대신 ‘시장’이라는 것이 있고, 이 시장도 변덕스럽고 잔인하기로 치면 결코 왕 못지않다.

자기가 누구이며 진정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워낙 문화적인 암시와 통제가 강력해서 정체성이나 개성을 탈취당하고 사는 현대에서 예술가란 드물게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개인’이라고 에리히 프롬은 규정했다. 그러나 프롬도 “예술가의 지위는 상처입기 쉬운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 개성이나 자발성이 존중되는 것이 실제로는 성공한 예술가의 경우일 뿐이고 만일 작품이 팔리지 않으면 그는 이웃사람들로부터 괴짜나 신경증환자 취급받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몇해 전 우디 앨런의 <브로드웨이를 향해 쏴라>에서 우리는 바로 그렇게 이웃사람들로부터 정신병자 취급받는 극작가를 보았다. 깡패인 투자자와 작품계약을 맺고 깡패의 애인을 주연으로 캐스팅하는 극작가 셰인은 한밤중에 창문을 열고 “나는 창녀야! 돈에 팔렸어!”라고 동네가 떠나갈 듯 소리친다.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돈에 몸을 팔았어. 내 예술, 내 작품도. 내가 그렇게 성공에 목을 맸던 걸까.”

작가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면 누구나 이 대사 앞에서 속이 불편해질 것이다.

소설가는 독자에게 읽히기 위해서 쓰고, 영화감독은 관객에게 보이기 위해 찍는다. 그건 최소한의 직업의식에 해당한다. 그것까지 부인한다면 그건 작가도 아니다. 그런데 독자와 관객 앞에서도 최소한 자신의 할말을 추스르고 마음에도 없는 말이나 자기 생각과 다른 말은 하지 않는 게 또한 작가의 자존심에 해당한다. 한국영화판에서 우리는 어떤 작가들을 보면서 ‘아무래도 저 이는 직업의식 때문에 자존심을 버린 거 같아’라는 혐의를 걸게 된다. 그런가 하면 직업의식을 발휘하면서도 자존심을 별로 다치지 않은 것 같아 보이는 작가도 리스트를 작성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그 리스트에 이름이 오를 가장 확실한 멤버들 가운데 한 사람은 이창동이다.

♣ <박하사탕>

2, 세 남자 이야기

<초록물고기> 이후에 나는 늘 이창동의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하게 되었다. 세헤라자데의 왕처럼 호기심에 가득 차서.

90년대 이후의 한국영화 문제작들이 수많은 캐릭터들을 생산해냈지만, 그 인물들 가운데 대다수는 그야말로 트렌드따라 왔다가 트렌드 타고 사라졌다. 그런데 유독 이창동의 인물들은 다들 주민등록번호와 주소가 정확히 찍힌 주민등록증 하나씩 지갑 안에 넣고 우리 주위에 섞여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중에서 <박하사탕>의 영호는 실제로 나하고 동갑이다. 60년생이고, 만일 그 철로 위에서 “나 돌아갈래!” 하고 두팔을 번쩍 들었다가 기차가 덮치기 전에 잽싸게 뛰어내려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면 지금 마흔세살이다. 나머지 두 사람, 막동이하고 홍종두는 다 내 후배들이다.

이들 세 남자 중에서 아무래도 조폭의 ‘똘마니’가 된 막동이가 나하고 노는 물이 제일 다르긴 하다. 하지만 우리가 자라난 동네가 도시개발로 사라지고, 다방 나가는 여동생을 나무라면서 그 여동생한테 용돈을 타 쓰고, 식당 하나 열어서 가족과 함께 사는 꿈을 꾸고, 뭐 그런 건 우리 자신의 모습들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 그렇게 변화무쌍한 개발도상국을 살아왔으니까. 막동이가 형한테 전화를 해서 어렸을 적 초록물고기 잡겠다고 냇물에 들어갔다가 ‘쓰레빠’ 잃어버린 얘기를 할 때 나도 내가 잡으려던 초록물고기는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했었다.

막동이는 노는 물은 달라도 바탕은 순진한 녀석이었는데 영호는 아주 질이 나쁜 놈이다. 광주에 진압군으로 가서 죄없는 여학생에게 총을 쏜 거야 본인의 뜻이 아니었다 쳐도, 경찰서에 잡혀온 운동권 학생을 악랄하게 고문하고, 바람 피고 아내를 패고, 이건 그야말로 공공의 적이다. 그가 스무살엔 사진작가를 꿈꾸었고 여자친구에게 박하사탕을 건네받으면서 수줍어했다 해도 그 죄상을 용서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영화를 불평하기도 했다. “나쁜 짓을 골라서 해놓고 왜 징징 짜면서 동정을 구걸하는 거야?”

광주가 끝난 뒤 80년대 내내 진보적인 지식인들 대다수는 자신을 광주의 전사들에 투사시켜서 생각하는 습관이 있었다. 도청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은 윤상원 주변쯤에 자신을 놓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홍희담의 <깃발>을 정치적으로

올바른 광주문학의 표본으로 간주했고, 나중에 <꽃잎>으로 영화가 된 소설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가 발표됐을 때는

‘웬 핀이 나간 문제제기야? 피해의식으로 역사를 정리하려 하다니!’ 그런 평을 안겼다. 세월은 가끔 차이를 지우기도 하는 것이어서,

90년대가 되자 이젠 80년 당시 광주를 둘러싼 피아의 구분도 희미해졌고 그때 광주사람들을 폭도라 했던 이들도 마음 편히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