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워닝(Spoiler warning) : 이 글을 읽는 분 가운데 혹 <폰>을 아직 안 보신 분이 있다면, 이 글을 읽음으로써 영화의 내용을 미리 알게 ㅗ딜 수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영화에 대해 말하기 전에 여담 한 가지. ‘폰’이라는 글자를 자판을 통해 입력할 때, 실수로 한/영 전환키를 잘못 눌러놓으면 ‘VHS’라는 글자가 모니터에 뜬다. 이건 뭐지? <가위>에 이은 안병기 감독의 두 번째 영화 <폰>은 이제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 되어버린 휴대폰을 원혼이 보내는 전언의 전달자로 활용하고 있는 영화다. 영화를 보다보면, 이 작품이 저주가 실린 비디오테이프를 소재로 삼은 나카다 히데오의 공포영화 <링>에 일부 의존하고 있음을 곧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내 모니터 위에 잘못 나타난 ‘VHS’라는 글자는 사실 감독의 애교 넘치는 장난에 의한 것이었던가? 우연치고는 너무 절묘하지 않은가 말이다.
불륜, 익숙한 비극의 씨앗
이야기의 발단이 되는 사건은 익숙한 불륜의 드라마다. 아내와 귀여운 딸이 있는 한 가정의 가장이 우연히 만난 천진한 여고생과 사랑에 빠진다. 여고생은 임신을 하게 되고 남자는 그녀를 멀리하려 한다. 남자를 놓치고 싶지 않은 그녀는 끊임없이 그의 주위를 맴돌고 결국 그의 아내에게 발각되고 만다. 두 여자의 말다툼은 격한 몸싸움으로 이어지고 뜻하지 않은 사고로 여고생은 목숨을 잃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시체는 부부가 새로 구입한 저택의 벽 속에 넣어져 아무도 모르게 봉해진다. 가족멜로드라마 더하기 공포영화라는 한국적 전통이 여기 고스란히 남아 있다. 문제는 이만희의 <마의 계단>이나 김기영의 <하녀>가 당대의 관객을 둘러싸고 있던 사회적 컨텍스트를 집요하게 환기시켜 판타스틱한 장르에 서사적 사실성을 부여할 수 있었던 것, 그럼으로써 스크린에 펼쳐지는 환영이 어느 순간 실재와도 같이 관객에게 달려드는 순간을 창출해냈던 것이 과연 <폰>에서도 가능할 것인가에 놓여 있다. 대답은 물론 ‘아니오’가 될 것이다. 어렵사리 태어난 아이와 미처 태어나지 못한 아기, 부르주아 가족 내부에 잠재된 불안의 요소들을 어지러이 펼쳐놓고서도 영화는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건드리지 않은 채 (호러무비가 아닌) 서프라이즈무비의 완성을 향해 달려간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감독은 이 60년대 한국 공포영화의 ‘가족멜로드라마로서의 공포영화’의 서사를 플래시백의 구조를 통해 플롯의 후반부로 제쳐두고, 재빠르게 동시대 공포영화의 소재를 향해 이동한다. 휴대폰과 같은 기술적 발명품들이 저주의 전달자가 된다는 설정은 분명 흥미로운 것이며, 전근대와 근대의 교접이라는 측면에서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폰>은 <링>에서 희미하게나마 감지되었던 미디어의 속성에 대한 통찰에 미처 도달하기도 전에, 성급히 앞서 언급한 60년대 한국 공포영화의 관습으로 빠져들어가서는, 급기야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에서 차용한 결말과 함께 끝을 맺는다. 즉 감독은 이번에는 영화 <링>의 공포가 순전히 저주가 깃든 비디오테이프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끝없는 저주의 연쇄가 상기시키는 임박한 절멸에 대한 암시 없이는 <링>의 공포는 완전한 것이 되지 못한다. 반면 지원이 물 속에 내던진 휴대폰에 다시 한번 발신인 불명의 전화가 걸려오는 것을 보여주는 <폰>의 마지막 장면은 지겨운 우스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휴대폰과 <엑소시스트>의 함수관계
한 품은 여고생의 원혼은 장르의 역사를 옮겨다니기 바쁘다. 생각하기에 따라 <폰>은 공포영화라기보다는 코미디로 여겨질 수도 있다. 생전에 제법 공포영화를 좀 보았던 모양인지, 원혼이 자신의 전언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은 <링>과 <엑소시스트>를 적당히 오가는 식이다. 마침내 ‘011-9998-6644’라는 번호가 잡지사 기자 지원의 것이 되기 이전, 영화 속에서 가장 억울한 죽임을 당한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 두 인물 앞에서 원혼은 쓸데없는 ‘깜짝쇼’를 벌인다. 원혼의 출현이 진정 복수 때문인지 단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기 위한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처음에는 지원 이전에 ‘011-9998-6644’라는 번호를 쓰고 있던 이들이 왜 무참히 죽어나가야 했는지에 대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 또한 지원에게 보내는 원혼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이 번호는 불길하다. 이 번호를 지니고 있던 이들이 죽어나간 데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다. 다만 대개의 공포영화들과는 달리 그들의 죽음이 원혼의 복수심 때문에 초래된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의미심장한 신호를 구성하기 위한 원혼의 임의적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이 좀 특이하다. 쉽게 말해 그들은 재수가 좀 없었던 것이다. 여하간 그들의 죽음이 없었다면 지원은 굳이 탐정의 역할을 자처하면서까지 그 불길한 번호의 최초 소유자를 찾아내려 애쓰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최초 소유자를 찾아낸다 하더라도 거기서 무언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기란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런데 마침내 원혼의 전언이 휴대폰을 통해 잡지사 기자 지원에게 도달하는 그 순간부터, 혹은 호정과 창훈의 귀여운 딸 영주가 지원의 휴대폰을 집어든 그 순간부터 사실 영화는 별 흥미를 끌지 못한다. 왜냐하면 지원이 의문의 죽음을 맞은 사람들에 관한 조사에 착수하는 것은 그녀가 시체가 감추어진 저택으로부터 한동안 벗어나야 함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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