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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온 킹>,호밀밭 파수꾼과 마주치다
2002-08-08

비디오 카페

몇년 전에 과외를 했던 애와 집 앞에서 마주쳤다. 한동네에 산다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란 바로 이런 때다. 우리의 관계는 헬렌 켈러와 설리반 선생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돈이나 좀 벌어볼 양으로 전단지를 붙였던 나는 중고생 대신 맞벌이 부부의 초등학교 3학년짜리 딸을 제자로 삼게 되었다. 그리고 그애의 엄마로부터 떨어진 지령은 과외선생이라기보단 차라리 바쁜 엄마아빠와 오냐오냐 하는 할머니를 대신한 보모 노릇이었다. 숙제검사부터 시작해서 준비물 확인, 피아노 연습 체크, 같이 6·25 포스터 그려주기 등등….

게다가 그 또래다운 엄청난 산만함과 자기가 짝사랑하는 애와의 로맨스에 대한 상상, 자기말을 듣지 않으면 부모에게 일러서 해고시키겠다는 둥의 유치한 협박 따위를 매번 듣고 있으려니 아주 신물이 나서 결국 딱 한달 만에 전화로 자진 사퇴 의사를 밝히고야 말았다. 무척 섭섭해하던 그애의 엄마와 할머니는 나중에 그애한테 마지막 인사라도 하라고 했으나 일단 “네…”라고 겸손하게 말해둔 나는 수화기를 놓자마자 안도와 해방의 한숨을 내쉬기에 바빴다.

이제 중학생이 된 그애의 손에는 두개의 비디오와 한권의 책이 들려 있었다. <접속>과 <전함 포템킨> 그리고 <호밀밭의 파수꾼>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못한 채, 들고 있던 요구르트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애는 내가 간만에 다시 빌린 <라이온 킹>을 상당히 예리하고도 얄밉게 힐끗 한번 쳐다보더니 전보다 빨라진 걸음으로 총총총 사라져갔다. 휘유…!손원평/ 자유기고가 thumbnail@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