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8년 전쯤 되나. 창비사의 한 방에서 김사인(문학평론가)과 오랜만에 만나 시분저분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문 밖 복도에서 무언가가 흘끗 지나갔다. 어잉? 사인아. 여기 무슨, 사슴 키우냐?… 예?… 무슨?… 방금 사슴 한 마리가 휙 하고 지나갔다니까?….
당시 계간지 창비의 편집위원인가 자문위원인가에 이름을 올리고 그러잖아도 착함과 웃음이 얼핏 너무 ‘헤퍼’(?) 보이는 얼굴을 다시 한번 착한 웃음으로 단도리하며 쑥스럽다는 듯, 그러나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선배 겸 손님 ‘접대’에 마음을 쓰던 그의 표정이 일순, 황당해졌다. 4층 건물 복도에 무슨 사슴 한 마리?… 하지만, 다시 사슴이 휙 지나가고 그는 곧 파안대소했다. 아, 저분요? 형, 황인숙씨 처음 보나? 핫하, 맞아. 사슴 한 마리, 하하. 잘 봤어….
그렇게 나는 시인 황인숙을 처음 만났고 그뒤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사슴의 ‘살림 혹은 체온’을 갈수록 가깝게 느끼는 ‘친밀의 경이’를 시도 때도 없이 느낀다. 경이라…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 작품 첫 대목이다. .
그날은 비들의 축제일이었다. 모든 근심과 우울을 씻어버리라고, 이렇게 씻어버리라고 비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몸을 비틀며 와글와글 쏟아져내렸다. 활씬 벗은 빗줄기가 춤을 추며 쏟아져내려 콸콸콸 호쾌한 소리를 내며 길 위를 달려갔다. 청배는 저도 모르게 싱글거리며 발을 팡팡 굴렀다….
‘활씬’에서 그야말로 통쾌한 자기선언에 달하는, 이렇게 경쾌한 육감(의 시작)이 또 있을까. <지붕…>은 어른을 ‘위한’ 동화지만, 그 점에, 좀더 엄밀하게, 그리고 좀더 근본적으로, 어른이 ‘되는’ 동화다.
소재상으로 열아홉 청배가 스무살로 접어드는 ‘이야기’지만, ‘주제 혹은 문체’(그러므로 미학)는, 문학이 (육체가 아니라)육감 속으로 나이를 먹는, 그렇게 기억을, 가난의 기억(옥탑당, 세상에서 배역을 맡지 못한 홍배, 지하도 구걸 거지, 순둥이 노처녀가 이루는 환경)조차 다이어트하는 광경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문학이 기억이 영원히 아름다운 몸에 달한다는 세계관이고, 형상화다. 그렇게, 그리고, 그러므로 ‘돈이란 결국 관념이고 이미지다’는 경구는, 세계관과 형상화의 아찔한 중첩이다.
아, 사슴의 기억, 의 몸. 44살의 문학이 달하는. 그리고 그것을 좇아(!), 65살(이제하)의 삽화가 달하는. 김정환/ 시인·소설가 maydapoe@thrun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