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갚아주오.” 사내는 내 손을 잡은 채 숨을 거두었다. 낡은 교회의 십자형 창문으로부터 불길한 핏빗 그림자가 드리운다. 이곳이 성스러운 곳이었던 건 아주 오래 전의 일, 지금은 지옥까지 이어진 어둠의 공간이 돼버렸다. 믿을 것은 검 한 자루뿐, 무거운 문을 어깨로 있는 힘껏 밀어 열고 신중하게 발을 내디딘다. 흔들거리는 촛불빛에 교회는 조용하다. 곳곳에 놓여 있는 관을 지키는 것은 죽은 자뿐. 갑자기 호전적인 외침과 함께 하급 마물들이 새카맣게 몰려든다. 세계를 구할 용사는 순식간에 넋이 나가버렸다. 어떻게 도망쳐나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녀석들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아직도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지니고 있던 검까지 어디선가 떨어뜨리고 없다.
이미 나온 지 몇년이나 지난 <디아블로>를 처음 플레이했을 때 벌어졌던 일이다. 결국은 엔딩까지 봤지만 허리춤 정도밖에 오지 않는 조그마한 녀석들이 악마같이 덤벼들던 순간의 공포는 지울 수 없다. 더 잊을 수 없는 건 수치스러운 기억이다. 같이했던 친구가 잊을 만하면 그 장면을 들먹이며 약을 올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런 식의 경험을 한 건 <디아블로>에서만은 아니다. <버츄어 파이터2>는 3D 격투게임의 양대 산맥 중 하나다. 하수답게 이른바 ‘짠손’으로 알려진 ‘사라’라는 캐릭터를 골라 막 연습에 돌입한 참이었다. 아직 변변한 기술도 모를 때라 단순한 펀치와 킥만 몇번 날리다가 무심코 점프를 했다. 그런데 너무 높이 뛰어서 상대편 머리 위로 넘어가버렸다. 상대 캐릭터는 그런 나를 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엉덩이를 걷어차버렸다. 사라는 링 밖으로 나가떨어졌고 결과는 링 아웃으로 나의 패배였다. 게임이 시작된 지 고작 십초 정도 지난 때였다. 안타깝게도 이 사건은 집이 아닌 오락실에서 일어났다. 동네 꼬맹이들의 야유 속에 후닥닥 가방을 짊어지고 오락실을 뛰쳐나왔다.
<수도고 배틀2>는 일본 도심 순환 고속도로인 ‘수도고’를 무대로 벌이는 카 레이싱 게임이다. 지나가는 차에 결투 신청을 해 받아들이면 곧장 시합에 돌입한다. 경기장이 아닌 일반 도로를 배경으로 한다는 게 특징으로, <이니셜 D>라는 만화를 한창 재미있게 보던 차라 게임은 물론, 핸들 모양의 전용 컨트롤러까지 구입해서 플레이에 돌입했다. 기분 같아서야 어려울 게 뭐가 있을까 싶었는데 시작하니 그게 아니었다. 출발하자마자 갓길로 빠져들더니 고가도로 벽을 멋지게 들이받았다. 곧 다시 출발했지만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당장 음주운전 혐의로 체포돼도 할말이 없을 것 같았는데 다행히 교통 경찰은 없었다. 간신히 지나가던 차에 신호를 보내 결투가 시작되었는데, 화려한(!) S자 운행 끝에 급기야는 엉뚱한 곳으로 빠져서 게임이 끝나버렸다. 더욱 비참한 것은 이 게임에는 ‘리플레이’ 기능이 있어서 자신의 플레이를 몇번이고 돌려볼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장에 있었던 친구는 물론 그렇지 않은 녀석들까지 한동안은 내 플레이 이야기로 심심치는 않았다. 플레이 수준에 따라 자동으로 붙여지는 게임 속 칭호는 충격적이게도 ‘공공도로의 바퀴벌레’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주위에 게임을 잘하는 사람보다는 못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플레이 앞에서는 자신의 쓰라린 기억은 깡그리 잊어버린다. 고만고만한 추악한 플레이들을 서로서로 비웃는 것 역시 게임이 줄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라고 말하면 단순히 얼굴이 두꺼운 걸까? 박상우/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