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회에 이어) 당시 <천하장사 임꺽정>과 <몽녀>의 촬영을 맡았던 장석준은 ‘입체영화 전문 촬영기사’라고 불릴 만했어. 입체영화를 찍을 때 쓰이는 특수 색경(color lens)은 미라맥스에서 지원받았지만, 카메라는 수입하지 않고 그이가 직접 만들었어. 일반 촬영 카메라 두대를 붙인 듯한 모양을 한 그이의 카메라는 렌즈가 두개, 마그네틱 필름롤을 넣는 곳도 두개라 같은 장면을 동시에 두개의 필름에 담을 수 있도록 만든 거였어. 그렇게 만들어진 입체영화는 입체영화용 안경을 써야지만 감상할 수 있었는데, 하나에 20원씩 하는 대여용 안경을 받으려고 길게 늘어선 줄이 떠오르는군. 평면의 화면에 깊이를 부여한 입체영화는 관객에게 큰 충격이자 새로운 즐거움을 안겨주었지. 이후 장석준의 카메라는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인수해 보관하고 있는 중이야.
영화계에 몸담고 있는 동안 수많은 배우와 감독들이 나의 프레임 안을 채웠어. 카메라 렌즈 너머로 그들을 지켜보며, 안타까운 현실에 같이 가슴 졸이고, 즐거운 일이 있을 땐 함께 웃었던 기억이 새삼스레 떠오르는군. 92년 세상을 뜬 여배우 남정임의 데뷔 초기 때의 일이야. <유정>(1966, 김수용 감독)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전, 그녀는 정진우 감독의 <악인시대>(1966)에 잠깐 얼굴을 내비친 적 있어. 거기서 그녀는 아주 작은 단역으로 출연하는데, 대사도 없는 역할이었지. 그냥 주인공 앞에 찻잔을 놓는 장면을 찍은데, 어찌나 긴장을 했던지 손을 덜덜 떨고 만거야. 감독은 몇번 컷을 부르더니, 그만 부아가 치밀어 “너 그래 갖고 어디 배우할 수 있겠어?”하고 역정을 냈지. 그 소리에 더 움츠러든 남정임은 겨우 그날 촬영을 마칠 수가 있었어. 풀이 죽어 촬영장을 나서는 그녀를 보며 어찌나 안쓰럽던지. 만약 그녀가 그 길로 나가 ‘난 연기가 체질에 맞지 않나봐, 다른 길을 알아보자’고 했다면,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은 채 그대로 사라져버린 배우였을 거야.
그런데 바로 다음 작품인 <유정>에서 그녀는 초연답지 않은 당찬 연기를 선보여 그해 청룡상과 아시아영화제 신인상을 당당히 거머쥐었어. 첫 영화에서의 어색하고 서투른 연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열심히 연구하고 노력한 끝에 일궈낸 그녀의 첫 승리였어. 당장에 주변부에서 카메라의 중심으로 들어온 그녀는 내내 주연의 자리에서 빛나는 모습을 보여줬어.
60년대는 과연 한국영화의 전성기인데다, 여배우들의 인기 경쟁 또한 치열하던 때였어. 60년 대 초반 문희, 남정임,
윤정희 트로이카에 이어, 김지미가 등장하고, 장미희, 정윤희, 이보희가 인기 여배우의 대를 이었지. 여배우들의 사진을 찍을 때면 항상 어느
한 사람에게 치우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어. 여배우라면 자신의 얼굴이 나가는 사진 한장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예쁘게 찍기보다 더 중요한 건 역시 작품의 느낌을 살리고, 장면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것이었으므로, 잔뜩 찡그리고, 악쓰고,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도 나중엔 작품성의 측면에서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거지.
배우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일만큼이나, 감독들의 개인사를 가깝게 지켜볼 수 있는 지난 세월이기도 했어. 유난히 많은 작품을 함께했던 박구 감독, 임권택 감독과는 피를 나눈 형제처럼 지내기도 했지만, 짧은 만남 동안 강렬한 인상을 남긴 감독도 있었지. 그게 바로 하길종 감독이야. 하 감독과는 <(속)별들의 고향>(1978, 장미희·신성일 주연)으로 첫 대면을 했어. 당시 영화계로선 보기 드문 인텔리였던 하 감독은, 사회문제를 의식있게 다루려고 늘 고민하던 사람이었어. 그러나 사회는 그와 그의 작품세계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어. 몇번의 작품 발표가 있고 나서 흥행에 잇따라 실패하자 하 감독은 <(속)별들의 고향>을 통해 재기하려는 의지를 다졌지. 다행히 영화는 전작보다 반응이 좋았고, 곧이어 후속작 <병태와 영자>(1979, 손정환·한진희 주연)의 촬영에 돌입했지.
경복궁 근처에서 후반부 촬영을 하던 중이었어. 오전 촬영을 끝내고 점심 시간이 됐는데, 하 감독이 밥을 먹으러 가는 나를 불러세우는 거야. “이봐 백 선생, 나 사진 몇장 찍어줘요. 며칠 뒤에 필요할 것 같아서….” 별로 부탁이 없던 사람이라 두말않고 사진을 찍어줬어. 흑백 원톤으로 7∼8컷을 찍었나, 늘 하던 대로 손에 담배를 들고 있는 모습, 입에 물고 하얀 연기를 뿜어내는 모습들이 담겼지. 그러고 몇달 뒤 영화가 스카라극장에 걸리기 하루 전, 그러니까 개봉을 하루 앞둔 저녁에 하 감독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거야. 혜화동 고려병원 영안실에 그가 안치됐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혼비백산했는지. 사람 일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지만 힘들게 재기하려던 하 감독의 모습이 떠올라 그만 목이 콱 메이더라고. ‘하필이면 이때라니….’
원래 영안실에는 하 감독의 가족이 준비한 영정사진이 안치돼 있었어. 근데 영화사에서 하 감독의 사진을 다른 걸로 바꿔서 거리 장례식 때 쓰겠다며 내가 찍었던 사진들을 찾아갔어. 나중에 하 감독의 장례행렬이 스카라극장 앞을 지나갈 때 현장에 있던 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어. 하 감독이 손에 담배를 들고 있는 바로 그 사진이 영정사진으로 모셔져 있는 거야. 생전의 모습이 그대로 묻어난 사진이라 그걸 썼다고 나중에 들었어. 일부 사람들은 영정 사진으로 저런 모습이 담긴 걸 쓰는 게 어딨냐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모습이야말로 하 감독의 평소 모습 그 자체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