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진은 지금 ‘강행군’ 중이다. 충무로는 그에게 조금도 휴식을 허락하지 않는다. 주말에 전라북도 위도에서 김기덕 감독의 <해안선> 촬영을 끝내자마자 상경했지만, 그는 곧바로 김상진 감독의 <광복절 특사> 촬영장으로 향했다. 타고난 부지런함이 그런 그를 더욱 채찍질한다. <라이터를 켜라> 개봉 축하 파티가 열렸지만, 그는 <광복절 특사> 촬영 전날이라면서 어느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대신 의상 체크하고, 헤어스타일도 다듬고, 오직 촬영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일에 있어서 그는 정말 철두철미하다. 이 정도면 냉혈한 아닌가. 그래서 주위 사람들 중 일부는 그가 아직도 갑작스런 기상악화로 위도에 발목잡혀 있는 줄 알고 아쉬워한다.
<광복절 특사> 촬영현장에서 만난 그는 좀처럼 시선을 주지 않았다. 대신 촬영현장을 빙빙 돌며 애꿎은 담배만 피워댔다. 설경구, 차승원이 끌어다 의자에 앉혀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리를 떴다. “긴장하지 않으면 실수해요.” 초보도 아닌데, 그럼 엄살인가. “연극 올렸을때 첫 무대는 실수가 없어요. 팽팽한 긴장감이 몸을 이끄니까. 그런데 두 번째 공연은 쥐약이죠. 릴렉스 되면 걷잡을 수 없거든요. 영화도 크게 다르진 않아요. 물론 때론 릴렉스도 필요하죠. 그걸 조율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직은….”
요즘 그가 부쩍 말수도 적어지고 현장에만 매달리는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속시원히 털어놓지 않지만 그는 또 한번의 ‘비상’을 꿈꾸고 있다. <간첩 리철진>의 깡패, <주유소 습격사건>의 용가리, <신라의 달밤>의 뱁새, <공공의 적>의 칼잽이까지. 양아치 전문 배우로 낙인 찍히기에 그는 가졌으나, 보여주지 못한 재능이 너무도 많다. 무엇보다 그는 아직 젊다. “고여 있으면 썩게 마련이죠”라고 에두르는 그는 이미 <라이터를 켜라>의 침착남에서부터 조심스럽게 커브를 틀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변신의 문턱에 들어선 만큼 그의 레이스는 곧 진기명기를 선보일 것이다. 여기, 그 확언의 이유가 있다.
비결 1 백문이 불여일견(百問而 不如一見)
“야, 좀 보고 배워라.”
“난 <오아시스> 때 이미 예습했다니까.”
7월18일 오전 7시50분, 서울 삼성동의 한 횟집 앞. <광복절 특사>의 18회차 촬영 직전, 김상진 감독과 설경구가 승강이를 벌이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날 ‘돌발사건’의 주범은 엉뚱하게도 자리를 뜬 유해진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스탭들보다도 30분 먼저 와서 대기중이었던 그는 촬영 직전 김상진 감독에게 불쑥 물었다. “감독님, 아무래도 3개가 낫지 않을까요?” <광복절 특사>에서 경찰 역을 맡은 그는 이미 전날 경찰서를 습격해서, 자신의 나이 또래 중에 밥풀을 네개씩 단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촬영 당일 아무래도 계급을 낮추는 것이 더 사실적이라는 것이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안 김상진 감독이 장난삼아 설경구에게 한마디 던진 게 승강이의 불씨였다.
어쨌든 미처 소품이 준비되지 못해 애초 설정대로 가야 했고, 한참 뒤에 짬이 나자 못내 마음에 걸리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의 답 또한 걸작이다. “아, 그거요. 극중에서 짭새가 어떤 성격이냐면요. 한번 필이 꽂히면 사정없이 물고늘어지는 스타일이에요. 생각해보니까 그런 성격이라면 그 나이에 그 정도로 빠른 진급이 가능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유해진은 대충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다. 사소한 것이라도 일일이 따진다. 캐릭터를 스스로에게 어떻게든 납득시켜야 한다. 하다 못해 사투리 하나를 배우는 데도 그렇다. <공공의 적>에서 “아따∼ 겁많소”라고 이죽거리는 그 유명한 전라도 칼잽이 용만. 그는 애초 목포 출신의 형님을 섭외해서 사투리를 갈고 닦았지만, 아무래도 성에 안 찼다. 직접 전라도로 직행, 시장통과 선술집을 전전하며 땀내나는 사투리를 듣고, 보고, 만져가며 감을 익혔을 만큼 그는 지독한 경험주의자다. 걸쭉하고 스피디한 사투리는 그렇게 재생됐다.
필모그래피
1970년 충북 청주 출생
서울예술대학교 연극과 졸업, 극단 목화 주요 출연작
<블랙잭> 덤프트럭 기사 역
<간첩 리철진> 종로 깡패 역
<주유소 습격사건> 양아치 용가리 역
<신라의 달밤> 조폭 뱁새 역
<무사> 농민 출신 무사 도충 역
<공공의 적> 칼잡이 용만 역
<라이터를 켜라> 기차승객 중 침착남 역
<해안선> 군과 마찰을 일으키는 남자 역
<광복절 특사> 끈질긴 짭새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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