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은 만화를 좋아한다.’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왜 좋아할까? 미국의 만화가이자 이론가인 스콧 맥클루드는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때, 상징화된 아이콘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상징화된 만화의 캐릭터에 자신을 투영한다는 ‘탈바가지 이론’을 정리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으면 지금 타인의 얼굴을 바라본 뒤 자신의 얼굴을 상상해보라. 타인의 얼굴은 아주 세밀하며 현실적인 ‘그 사람’이지만, 내가 상상한 나의 얼굴은 디테일보다는 상징적인 ‘많은 사람의 모습’일 것이다. 만화 이미지의 스펙트럼에서 어린이들이 즐기는 만화는 보통 개성적인 ‘그 사람’의 위치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위치에 존재한다. 이현세의 ‘까치’는 매우 개성적이며 독특하기 때문에 나와 동일시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지만, 길창덕의 ‘꺼벙이’는 우리 주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 이미지, 감동을 그림에 실어보내는 만화의 힘은 어린이를 위한 만화에 더욱 풍부하게 자리잡고 있다. 어른들은 마음의 벽을 쌓아 만화의 캐릭터들과 소통할 수 없지만, 어린이들은 열린 마음의 눈으로 만화를 보고, 만화의 세계를 풍부한 상상의 세계로 받아들인다.
왜 아이들은 만화를 좋아할까?
그래서 만화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어린이들의 벗이었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나와 같은 30대는 여러 세대를 통틀어 만화와 가장 친하게 어린 시절을 보낸 세대일 것이다. 특히 70년대와 80년대 도심(특히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소년중앙> <어깨동무> <새소년>과 같은 어린이잡지와 <소년한국일보> <소년서울신문> <소년동아일보>와 같은 소년신문에 실린 만화를 보았고, 일일공부에 연재되는 만화와 풍선껌에 들어 있는 만화, 우유회사의 판촉용 만화와 소시지 선전 만화에 음료수 광고를 위한 책받침 뒷면에 실린 만화까지 풍부하게 탐독하는 행운의 소년이었다. 전집이나 백과사전에도 만화가 수록되어 있었고, 클로버문고, 이서방문고와 같은 단행본 만화도 많았다.
박재동 선생이나 이희재 선생처럼 50∼60년대에 만화를 본 첫 번째 만화세대와 달리 70년대에 만화를 보기 시작한 두 번째 만화세대인 우리는 아주 편안하게 일상적으로 만화를 접하고 살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바로 나의 모습이자 우리의 모습이었던 ‘명랑만화’가 있었다. 만화를 보며, 칸 속에서 친근하게 움직이는 주인공들과 함께 웃고,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던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미지, 영상, 이야기를 정리하고 다루는 법을 배웠다. 그 결과는 지금 우리 세대가 우리의 전 세대와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본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박수동의 만화는 나에게 가장 친한 벗이자 일상이었고, 훌륭한 삶의 교훈이었고 피안의 휴식이었다. 온갖 찬사를 다 붙여도 모자랄 만큼 나는 박수동 만화를 사랑했고, 그 만화를 보며 성장했다. <신판 오성과 한음> 까치판 단행본 마지막 에피소드인 ‘육성회비’를 읽으며 가난과 정직과 우정 같은 가치를 배웠고(최근 출판본 제목은 <박떡배와 오성과 한음>이며, 이 책에는 육성회비 에피소드가 빠져 있다!) <번데기 야구단>의 밉지 않은 과장과 일본, 대만, 괌의 리틀 야구단에 맞서 승승장구하는 번데기 야구단의 승전보에서 호연지기를 배우기도 했다. 그 박수동 만화 가운데 지난 2001년 바다출판사에서 펴낸 , 산하에서 펴낸 <박떡배와 오성과 한음>에 이어 <홍길동과 헤딩박>이 올 5월에 출판되었다.
가난하고 배고팠지만
<홍길동과 헤딩박>은 <신판 오성과 한음>과 <번데기 야구단>보다 뒤에 나온 작품이다. 길창덕이 <소년중앙>에 연재한 <코메디 홍길동>처럼 <홍길동전>에 기초한 작품이지만 <홍길동전>과 특별한 연관은 없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와 같은 대목이나 ‘율도국의 건설’ 대신 백운도사에게서 도술을 연마해 3년 만에 백운산에서 내려와 헤딩박과 함께 탐관오리를 처단하는 길동이나 중국 왕빠우 도사와 싸우는 길동의 모습이 있다.
박수동 만화의 가장 큰 특징은 가난, 외로움과 같은 슬픔의 정서다. <번데기 야구단>에서 행상하는 어머니를 돕는 물꽁이 배가 고픈 동생들을 위해 번데기를 주머니마다 넣고 경기에 진 장면은 지금까지 어느 만화에서도 그리지 못했던 당대의 배고픈 삶의 모습이다. <홍길동과 헤딩박>에서도 빈민구제와 탐관오리 처단이 전면에 등장하는데, 아쉽지만 <신판 오성과 한음>이나 <번데기 야구단>의 강렬함보다는 슬픔의 진정성이 덜하다. 대신 특유의 유머와 넉살은 여전한데, 홍길동과 함께 활약한 2인자가 평안도 출신 박치기의 1인자 헤딩박이라는 캐릭터는 박수동식 유머의 집약이다. 당대의 독자들과 소통하는 난센스, 개성적인 캐릭터와 캐릭터를 통한 해프닝은 만화에 활력을 제공한다. 아! 도술로 인조인간 가징마 제트로 변한 장면은 <철인 캉타우>에서 캉타우가 마징가와 마주하는 장면에 버금가는 압권이다. <홍길동과 헤딩박>, 가장 열렬한 만화세대였던 30대 독자들에게 전하는 멋진 선물이 될 것이다. 단, 이 책을 구하기 위해서는 수고스럽지만 어린이 코너를 뒤져야 한다. 이명석/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