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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영상, 60년대 한국영화에도 쓰였어˝
2002-07-24

한국영화 최초의 `입체영화` <천하장사 임꺽정>의 스틸을 담당하다

(지난주에 이어) 그래서 나와 제작부장이 입을 다문 상태에서 촬영이 무사히 끝났어. 장비를 철수하고, 인천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붕대 감은 내 손을 본 스탭들이 하나둘 이유를 물어오니, 그제야 비로소 얘기를 꺼낼 수 있겠더라고. 당시 옆자리에 배우 황해도 타고 있었는데, 그이 성격에 대충 넘어가지 못하고 대뜸 “그걸 왜 진작 얘기하지 않았냐, 사람이 중하지 촬영이 중하냐” 꾸짖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전문으로 총을 쏘던 사람들도 아닌 배우들이, 가뜩이나 실탄이 든 총을 들고 연기를 하는데 얼마나 긴장이 되겠어. 그런데 누가 유탄을 맞았다는 소리가 들려봐, 배우들은 당연히 집중력이 떨어지고, 간혹 겁에 질리는 스탭들이 속출하지 않겠어? 그런 어수선한 분위기론 촬영이 제대로 될 리가 없잖아. 그래서 조용히 하라고 시킨 거야.” 순간 사람들이 조용해지더라고. 그때 제작부장이 다가와 참 고맙다고 몇번이나 인사를 하는 통에 어찌나 쑥스럽던지.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나로선 제작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결정을 내린 셈이었어.

유인촌, 황해 등과 <정조>(1979)를 찍을 때의 해프닝을 끝으로 들려주지. <정조>의 촬영지는 전남 신안 근처 우이도라는 섬이었어. 섬 모양이 소 귀를 닮았다고 그렇게 불리나봐. 현지 로케를 모두 마치고 목포로 가는 배를 탔는데, 일행이 많다보니 정원을 훨씬 넘어버린 거야. 게다가 도중에 황소까지 한 마리 태웠으니, 과도한 하중을 이기지 못한 배는 그저 중심을 잡기에도 바쁜 형국이었지. 하루에 두번밖에 운행되지 않는 배를 놓치지 않으려고 너도나도 올라탄 끝에 30명 정원의 배엔 60여명의 사람들이 북적댔고, 설상가상으로 태풍이 몰려온다는 아침 뉴스를 증명하듯, 바람이 거세게 불어대기 시작했어. 높은 파도를 이기지 못한 배는 앞뒤로 뒤집힐 듯 흔들렸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제자리에서 석고처럼 굳어버렸지.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는 상황에서 소가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요동을 치기 시작한 거야. 사람이라면 말로 달래 진정시킬 수 있었겠지만, 소를 달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어. 가뜩이나 무게 중심을 못 잡고 흔들리는 배 위에서 만에 하나 소가 난동을 부린다면 배가 뒤집히는 건 자명한 일이었지. 그때 누군가가 다급하게 소리를 쳤어. “소를 빠뜨립시다. 다같이 죽는 것보다 저 녀석만 빠뜨리면 배가 안전해지지 않을까요?”

침묵이 이어졌고, 다들 서로의 눈치만 살폈지. 흥분상태에 빠진 소를 바다에 빠뜨리겠다고 덤벼봤자, 어느 소가 얌전히 빠질 것인가. 제가 죽겠다고 스스로 물로 뛰어들지 않는 이상, 그 제안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발상이었어. 그 순간 할 수 있는 일이란, 황소를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소가 더이상 발작을 일으키지 않고, 뭍에 닿을 때까지 얌전히 있어주길 기도하는 거였어. 다행히 소는 점차 상황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부두에 닿을 때까지 큰 말썽을 부리지 않았지. 부두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라디오에서는 태풍경보가 발령되었음을 알리는 경보음이 들리더군. 그 순간 다리에 힘이 쫙 풀리면서 ‘살았구나’ 그 생각밖엔 들지 않았어. 당시 배에는 촬영스탭과 배우, 감독뿐 아니라 인솔 경찰도 하나 타고 있었는데, 나중에 들으니 그이는 사고 뒤 문책이 두려워 자살할 생각까지 했다더라구. 얼마나 긴박한 상황이었는지는 이쯤 설명하면 대충 알았을 거야.

요즘 말로 ‘VR’(Virtual Reality)이라고 하는, 가상현실, 혹은 입체영상이라고 하는 개념이 일찍이 한국영화에도 쓰였었지. 임권택 감독의 68년작 <몽녀>(김지미, 박노식 주연)와 같은 해 이규웅 감독이 신영균과 윤정희 등을 기용해 만든 <천하장사 임꺽정>은 한국영화 최초의 ‘입체영화’였지. 두 영화 모두 내가 스틸과 제작을 겸임했기에 어느 영화보다 의미가 깊어. 입체영화라고 하면, 실버스크린이라고 불리는 특수 스크린 앞에서, 입체안경을 쓰고 보는 영화를 말하는데, 지금의 놀이동산에 설치된 입체영화관이나 메가박스에 설치된 메가라이드의 영상과 비슷한 원리의 영화라고 할 수 있어. 당시 실버스크린 기술은 미라맥스에서 지원이 됐고, 지금은 남아 있는 견본이 없어. 입체안경은 내가 몇개 가지고 있던 견본을 고희 기념식 때 영상자료원에다 넘겼고.

사진·구술 백영호/ 스틸작가

54년간 영화현장사진에 몸담음

<유관순> <생명> <천하장사 임꺽정> <만다라> <바보사냥> <바보선언> <아다다> 등 100여 작품 5만여컷의 스틸작업.정리 심지현 simssisi@dreamx.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