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서정주 시인이 문열어라 문열어라 주문을 외우지 않아도 꽃들은 일제히 문을 열고, 아줌마 마음도 개나리처럼
화냥기 탱탱하게 부풀어 오르는 이 시점에, 아무리 팔할이 몽고나 중국산 먼지일지언정, 봄바람보다 더 마음 달뜨게 하는 영화란 있을 수도
없고 있지도 않았다.
착한 눈망울 하나로 승부하는 <천국의 아이들>은 그렇게 바람 잔뜩 든 상태에서 봐서 그런지, 영화를 다 보고나서도 별로 마음이 착해지지가
않았다. 알리는 귀엽고 자라는 예뻤고 이야기는 순진했지만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 이미 다 봐버린 귀여움과 예쁨과 순진함이었다.
현관에 널려 있는 아이들 신발을 하나만 남기고 몽땅 내다버리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다거나, 일단 단칸방으로 이사간 뒤에 허리 아프다는
핑계로 모든 집안 일을 아이들에게 떠맡겨버릴까 또는 아이들에게 필담을 습관화시킨다면 가정환경이 조금 더 조용해지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는 했다. 신데렐라는 잃어버린 유리구두 한짝 때문에 왕비가 되고, 알리는 잃어버린 운동화 때문에 마라톤 선수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도 소득이었다. 결핍도 때와 장소와 사람을 잘 만나면 재산이 된다는 사실은, 소 한 마리로 출발해 소 500마리로 생을 마무리한 정주영씨가
이미 증명해주고 돌아가셨다.
문제는 결핍이 때와 장소와 사람을 잘 만나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는 점이다. 다행히도 별로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아줌마도 한때는 ‘천국의
아이들’이었다. 기억 속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불러내면, 단칸방에서 세 식구가 오글보글 살면서 책상 하나 없이 방바닥에 엎드려 숙제하고 공부하던
장면, 엄마 심부름으로 외상으로 물건 사고 친지들에게 돈 꾸러 다니던 장면이 팝업 화면으로 떠오른다. 가난이 문 틈으로 새어들어오면 사랑은
대문으로 걸어나간다고 했는데, 사랑은 어땠는지 몰라도 그때 우리가 행복하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서 아줌마는 왜 제목이 ‘천국의 아이들’인가 궁금하다. 차라리 ‘가난의 아이들’이 더 솔직한 제목 아닌가 싶다. 보는 이들이야 에고
귀여워라 할지 모르지만, 입장 바꿔 그들이 되어보면 영화 속에서 그들이 행복을 느낄 만한 장면이 몇개가 되더란 말인가. 하긴 (남들 보기에)
가난과 아이들은 서로 잘 어울리는 짝이다. 서로 붙여만 놓으면 아무리 얘기가 엉성해도 보는 이의 심금을 반쯤은 울려놓고 들어간다고 봐도
좋다. <사랑의 리퀘스트> 같은 프로그램에서 소년소녀가장 얘기만 나오면 동전 먹은 주크박스처럼 자동빵으로 눈물을 생산하는 사람이 아줌마
하나는 아닐 테니까.
그런데 이런 소재의 다큐나 영화를 보고 있자면, 아줌마는 괜히 앉아서 위선자가 되는 느낌 때문에 찝찝해진다. <천국의 아이들>만 해도 그림이
그렇지 않은가. 가난한 아이들이 스크린 속에 예쁘게 진열돼 있고, 딴에 다달이 운동화 수십 켤레값 정도는 번다 싶어 헛배 부른 아줌마가
스크린 너머로 그 아이들의 가난을 탐스럽게 바라본다. 아이들 인성교육에 남못잖게 관심많은 아줌마는, 가난이 아이들을 저런 정도로 착하게
만들어준다는 보장만 있다면, 유행따라 세일러문 신발, 포켓몬 신발, 디지몬 신발을 차례로 신고 있는 자기의 아이들에게 저 가난을 돈 주고
사서라도 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영화를 보고난 뒤 자기 아이들 근검절약 교육용으로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할 어른들이 어디 한둘이겠나.
엊그제 아침의 일만 해도 그렇다. 전날 저녁 아이들 놀고난 현장의 잔해를 둘러보던 아줌마, 풀뚜껑을 덮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둔 것을 발견하고
아이를 불러 꾸중하는데, “저기 풀 또 있어”라는 태연한 답이 돌아왔던 것이니, 이런 영화 보여주면서 ‘정신 차려, 이 친구들아’하고 싶은
욕심이 안 생겼다면 거짓말이다. 밥상 앞에서 죄없는 북한 아이들 들먹여가며 제발 한숟갈이라도 먹어달라고 빌고, 큰 선심 쓰는 척 몇 숟갈
먹어주면 에고 장한 우리 딸 밥 잘 먹어 예쁘지 착하지 하는 꼬락서니를 몇년 동안 연출해왔으니, 누굴 원망하랴만.
그렇다고 해도, 운동화 한 켤레를 나눠신느라 죽어라 뜀박질하는 이란의 저 아이들이 왜 천국의 아이들이란 말인가. 엄마는 아프고 아빠는 가난하고
신발은 둘 앞에 하나뿐인 그들, 더럽고 냄새나는 운동화 한 켤레를 두고 매일 심장 터지는 바톤경주를 벌여야 하고, 상을 타고도 기뻐할 수
없는 그들이. 아이들에겐 죄가 없지만, 이 영화에 이런 제목을 붙인 어른들의 심보는 다분히 가학적이지 않은가 말이다. 가난 앞에서 지나치게
담담하고 동심을 지나치게 아름답게 보려는 눈에 대해서, 이제 아줌마도 슬슬 의심이 나기 시작한다.
주말엔 아이들을 데리고 이 영화를 보러 갈 작정이다. 말했다시피, 저렇게 사는 아이들도 있는데 너희들은 행복한 줄 알아, 할 생각은 없다.
대신 쟤들이 행복해보여?라고 물어봐야지.
최보은/ femolytion@dex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