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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스타워즈 에피소드2>를 보고 형상과 전형을 생각하다
2002-07-19

외계생물체가 직립보행하는 이유는?

<스타워즈 에피소드2: 클론의 습격>을 봤다. 첫 번째 <스타워즈>를 본 지 20여년 만이다. 그 사이의 <스타워즈>들을 나는 놓쳤다. 그 기다란 공백을 조금이라도 메워보려고 <씨네21> 358호의 ‘특집 <스타워즈> 백과사전’을 뒤적여보았으나 머리만 지끈거렸다. 상상 속 세계의 본기(本紀)와 열전(列傳)을 익히려고 마음을 다잡기엔 나이가 너무 든 모양이다. 사실 나는 이 영화를 즐기지 못했다. 스펙터클은 눈이 부시다 못해 아릴 정도였지만, 상투적 사랑과 상투적 전쟁과 상투적 음모로 엮인 스토리는 너무 상투적이었다. 이런 상투성을 못 견뎌하는 것도 이제 나이가 든 탓인지 모른다. 그러나 상원의원 파드메 아미달라와 제다이 기사 아나킨 스카이워커가 원형경기장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는 장면은 즐거운 생각거리를 주었다.

원형경기장에서 아나킨은 ‘우주 짐승’(이 아니면 ‘괴물’이겠지)과 맞서 싸운다. 고대 로마의 노예 검투사가 더러 사자와 맞서 싸웠듯. <스타워즈> 시리즈의 배경인 은하계에는 수많은 종족이 산다. 우리에게 익숙한 인간의 얼굴을 한 종족만이 아니라, 지구에 사는 온갖 짐승들의 얼굴을 빌려온 종족들이 함께 등장한다. 예컨대 900살의 제다이 마스터 요다, 우키족 출신의 우주선 정비사 츄바카, 겅간족 출신 청년 자자 빙크스 같은 이들이 짐승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모두 ‘인간’이다. 왜? 그들이 곧추 서서 걷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원형경기장에서 아나킨에게 덮쳐드는 생물체를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판단할 근거는 무엇인가? 당연히, 그것이 곧추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구 생태계가 바이러스에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 이르는 무수한 단계의 생물들로 이뤄져 있듯 은하계 전체의 생태계도 아마 그렇겠지만, <스타워즈>를 만든 지구인의 상상력 속에서 은하계의 생물군은, 적어도 동물군은, 인간군과 짐승(괴물)군으로 깔끔하게 나뉘고, 그 인간군의 특징은 직립인 것 같다.

실상 지구행성에서 직립은 주로 인류의 특징이다. 곧추 서서 걷는 펭귄이나 더러 직립 흉내를 내는 유인원들은 잠시 잊어버리자. 인류 진화사에서 직립보행은 앞발을 해방시켜 도구의 사용을 가능하게 만듦으로써 문명의 탄생을 촉진했다. 인류의 머나먼 방계조상이 어느 순간 벌떡 일어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직 수렵시대에도 들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직립이 인간의 자존을 상징하게 된 것은 자연스럽다. 꼿꼿이 서 있음으로써 인간은 자신을 네발짐승과 구별한다. 그 직립은 진리와 완성의 숫자 1의 직립이고, 힘차게 발기한 남근의 직립이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것이 늘 옳은 것은 아니다.

원형경기장 장면을 보며 몽테스키외의 <페르샤 사람들의 편지>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만약에 삼각형들이 신을 만들었다면 신에게 세 변을 주었을 것”이라는 구절이다. 1721년에 나온 <페르샤 사람들의 편지>는 프랑스를 여행하는 리카와 우스벡이라는 가상의 페르샤 사람 둘이 프랑스사회를 비판적으로 살피며 친지들과 주고받는 161통의 편지로 이뤄져 있다. 인용이 정확한지 확인하기 위해 책을 펼쳐보니 위 구절은 59번째 편지에 담겨 있었다. 리카가 우스벡에게 보낸 이 편지에서 그 구절이 나오는 대목은 이렇다. “우스벡, 사람들이 사물을 판단할 땐 늘 자기들을 기준으로 삼게 마련인 듯하네. 나는 흑인들이 악마를 눈부신 백색으로 그리고 신을 석탄처럼 검게 그리는 것에 놀라지 않네. 어떤 종족들이 그리는 비너스가 엉덩이 언저리까지 유방을 드리우는 것에도 놀라지 않네. 심지어 우상숭배자들이 모두 자기들의 신을 사람의 형상으로 표현하고 그 신에게 자기들의 기질을 나누어주는 것에도 놀라지 않네. 만약에 삼각형들이 신을 만들었다면 신에게 세 변을 주었을 거야.”

여기서 우상 숭배자란 옥좌 위에 앉아 긴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으로 신을 묘사하곤 했던 유럽의 가톨릭 신자들을 가리킨다. 리카는 신에게 형상을 주는 것을 금지하는 이슬람교 신자다. 이 대목에서 몽테스키외는 기독교의 신인동형동성설(神人同形同性說: anthropomorphism)을 비판하고 있다. 실상 이 깔끔한 비유의 원조는 몽테스키외가 아니다. 몽테스키외가 태어나기 10여년 전에 죽은 스피노자도 “만약에 삼각형이 언어 능력을 지녔다면 신이 근본적으로 세모꼴이라고 말할 테고, 원이 언어 능력을 지녔다면 신의 본성이 본질적으로 둥글다고 말할 것”이라고 쓴 바 있다. 더 올라가 고대 그리스의 시인-철학자 크세노파네스는 이런 시를 남겼다. “소와 말에게 손이 있다면/ 그리고 그들이 그 손으로 그림을 그릴 줄 안다면/ 말은 말 모양의 신들을 그리고/ 소는 신들에게 소의 형상을 주리라.”

은하계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가장 고등한 생물이 지구행성에 사는 우리들, 인류와 닮은 형상을 지닌 채 우리들처럼 움직일지는 알 수 없다. 아니 더 나아가, 그들이 도대체 형상이라는 것을 지녔을지, 움직이기나 할지조차 의문이다.고종석/ 소설가·<한국일보> 논설위원 aromach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