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의 박동을 강탈해가는 영화, <레퀴엠>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들(해리)은 어머니(사라)로부터 텔레비전을 빼앗아 밖으로 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어머니는 그런 아들에 맞서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결국 아들은 친구(타이론)와 함께 텔레비전을 들고 가 전당포에 팔아먹은 뒤 그 돈으로 마약을 사고, 어머니는 아이스크림과 함께 유유히 그곳을 찾아 텔레비전을 다시 사온다. 이미 이들은 그 짓을 반복해왔다. 그러므로 첫 번째 신에서 방문을 사이에 두고 나눠지는 분할화면은 이 영화가 어디로 향할지를 예시한다. 분할화면은 여기에서만 설정되어 있는 단발적인 테크닉이 아니다. 적어도 대런 애로노프스키는 총체적인 내러티브의 의도가 테크닉에 우선하는 영화감독이다. 그리고 우리는 때로 영화의 테크닉이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에 심각하게 골몰하기보다 그것이 어느 때에 등장하는가에 눈길을 주면서 그 의도에 손쉽게 다가가는 경우가 있다. 이 영화에서 분할화면은 언제, 무엇과 무엇 사이에 등장하여 서로를 갈라놓는가? 그것이 사라-해리, 해리-마리온(해리의 여자친구), 해리-타이론 사이에, 그리고 심지어는 사라-햄버거/냉장고 이에 쓰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영화에서 분할화면은 인물들간의 매끄럽게 봉합될 수 없는 관계 바깥으로 터져나온 굵직한 솔깃을 드러내고, 어긋남을 계속하는 욕망의 구도에 대한 스타일로서의 밑그림을 그린다(예를 들어 영화 초반부, 다정하게 누워 서로를 쓰다듬는 해리와 마리온의 분할화면을 눈여겨보라. 이 장면은 굳이 분할화면을 쓸 필요가 없다. 그것이 마냥 아름다운 사랑을 약속하는 것이라면.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두 화면의 인물 사이에 매치되지 않는 터치는 한눈에 들어오고, 그 다정함을 불길함으로 직감하게 한다). 하지만, 지금 분할화면이 이 영화의 전부라고 말하고 있는 중은 아니다. 파멸의 내러티브를 구조화하는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요구에 일단 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이 영화의 중심을 대면할 수 있다.
중독된, 혹은 중독시키는
대런 애로노프스키는 사라ㆍ해리ㆍ마리온ㆍ타이론의 각각 단절된 상황으로부터 서로의 의미항을 이항시키면서 영화적인 고리를 지어내고 있다. 해리의 마약 투여장면은 사라의 커피 마시는 장면으로 이어붙고, 해리가 돈을 꺼내는 장면과 사라가 드레스를 꺼내는 장면은 동일한 카메라 포지션으로 보여진다. 또는 마리온이 헤로인을 구하러 가기 위해 화장을 하는 장면은 약에 중독되어 고통스러워 하는 사라의 모습과 교차편집된다. 그리고 타이론은 환각상태에서 어머니의 기억을 불러들인다. 의미적으로, 해리가 헤로인에 중독되는 것과 사라가 다이어트 약에 중독되어가는 것은 같은 속도를 유지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사라의 욕망은 마리온이 대신 보유하고 있고, 마리온의 물리적인 고통은 사라를 통해 직접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또는, 타이론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해리의 변주곡이다.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파멸의 귀착을 위해 똑같은 경로의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는 중이다. 때문에, 영화 안에서 떠도는 ‘플로리다’의 상징성은 정확히 여기쯤에 위치한다. 이 영화에는 봄이 없다. 대신 황무지로서의 플로리다가 있다. 사라가 시작하는 다이어트 요법의 제1장은 ‘삶은 계란(마치 태양을 상징하는 듯한)’과 ‘자몽’이다. 해리와 타이론이 헤로인을 배급받는 것에 실패하는 순간 ‘플로리다 오렌지’가 적힌 트럭은 그들 앞을 지나간다. 해리가 겪는 단 하나의 아름다운 환각은 해변에 서 있는 마리온이다. 급기야 해리와 타이론은 헤로인을 구하기 위해 겨울에 플로리다로 향하고,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파국을 맞는다. 죽어버린 꿈을 꾸는 사람들 사이에서 플로리다는 마치 잡히지 않는 무인도처럼 떠돌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한결같이 꿈을 잊어버리지는 않고 있다. 사라는 살을 빼서 아름다운 붉은 드레스를 입고 텔레비전 다이어트 쇼에 출연하는 것이 꿈이며, 해리는 돈을 모아 사라, 마리온과 함께 단란하게 사는 것이 꿈이고, 마리온은 옷가게를 여는 것이 꿈이다. 그리고 타이론에게 꿈은 ‘한몫잡아 보는 것’이다. <레퀴엠>에서 정작 이들의 꿈을 망치고 있는 것은 말할 필요없이 ‘약(마약)’이다. 사라에게도, 해리에게도, 마리온에게도, 타이론에게도, 약은 결코 그들이 이루고 싶은 꿈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을 연명하게 하는 것도 약이다. 해리가 약을 팔아 돈을 모으려 하고, 사라가 약을 먹고 살을 빼려 하고, 메리온이 몸을 팔아 약을 구해야만 하듯, 그들을 조정하고 조율하고 있는 것 역시 다시금 보이지 않는 실체로서의 약인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이 레퀴엠의 작곡자가 약 그 자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관계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극장을 나오는 우리에게 아마 중요한 건 그런 것이 아니었을 거라고 부인하게 한다. 마치 약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하면 이 영화를 잘못 말하고 있는 것처럼, 대신 그것을 ‘중독’이라는 용어로 대체하면서 우회시켜, 격상시키고, 안심하려 한다. 감독 대런 애로노프스키조차 그런 것 같다.
고뇌인가 고통인가
그러면, ‘중독’이라고 정의할 때 그 방점이 어디에 찍히는가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 만약 <레퀴엠>에서 그것이 삶의 피폐함과 정신적인 외로움의 가속화를 일컫는 것이라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사라에게 물어보자. 사라는 그냥 빨간 드레스를 입고 싶은 것이 아니다. 해리의 졸업식날, 그녀와 남편과 아들이 행복한 한때를 이뤘을 그때 입었던, 바로 그 빨간 드레스를 입고 싶어한다. 과거를 돌리고 싶어한다. 그러면 해리의 졸업식까지만 해도 화목했던 이 가정이, 아버지가 없는 가족관계로 재구성되며 왜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각자의 세계에 매몰되게 되었을까(그리고 도대체 이 영화에서 아버지들은 죄다 어디로 간 것일까? 다들 해리의 아버지를 따라 단체로 죽은 걸까? 여기에 대한 어렴풋한 실마리는 <파이>에 있다).
설명들이 꼬리를 감춘다. 일부러 생략한 것이든, 잘못 누락된 것이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영혼이 혼미해져 가는 정신적인 황폐함으로서의 중독은 이 영화의 의미생산에 부합하지 않는다. 영혼의 중독에 대해 말하려면 약 이외의, 삶과 세계의 부작용들에 관한 관계가 드러나야만 한다. 약으로 인한 고통이 아니라, 그것이 야기하는 삶의 고뇌가 부각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숫자와 신, 질서와 무질서, 뇌와 직관, 동공과 태양이라는 대결구도를 맺으며 그 고뇌를 철학적으로 승화시킨 것이 전작 <파이>이다. 이 세계를 움직이게 하는 규칙은 있는가, 과연 세계는 무질서 한 것인가, 그것을 숫자의 규칙성으로 파악해낼 수는 없는가, 왜 우리는 태양을 직시하지 못하는가, 216자리 숫자를 해독하는 순간 과연 신은 지상 위에 내려올 것인가, 과연 신의 섭리를 상대로 유레카라고 외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파이>의 천재수학자 맥스 역시 약에 중독되어 있지만 그에게 있어 약은 이런 고뇌의 질문을 지속하기 위한 것이지, 의미없는 고통을 당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레퀴엠>은 그런 ‘고뇌’가 아니라, ‘고통’에 매달리기 위해 약을 끌어들인다. 이 점이 바로 <파이>와 <레퀴엠> 사이의 가장 다른 점이다. 그러므로 중독은 방점을 다시 찍고 순전히 ‘물리적인 중독’으로 옮겨가야 한다. 사라는 날이 갈수록 더 격한 환각의 상태로 빠져든다. 그녀의 말라가는 몸은 주사바늘의 흉터로 절단해야 하는 해리의 팔만큼 흉물스러워진다. 깊어가는 것은, 늘어나는 약에 따른 육체의 고통과 뇌 손상이다. 병원에 실려간 사라가 받는 치료가 무엇인가. 무지막지하게 달려든 의사들은 끝내 그녀의 뇌에 전기충격을 가한다. 또는 마리온의 ‘정신과(!)’ 의사 아놀드(<파이>에서 천재수학자 맥스 밀리언 역을 맡았던 션 굴레트)는 그녀에게 무슨 도움을 주었던가? 대화치료? 천만에. 대화 대신 그가 마리온에게 준 것은 몸값으로 건넨 돈이다. 마리온의 그 돈으로 해리는 또다시 약을 사려 한다. 추락의 몸짓들이 이어지고 있다.
진실과 모순, "유레카?"
대런 애르노프스키는 <파이>에서 던졌던 질문들의 단초를 <레퀴엠>에서 그대로 등장시키면서도 결론적으로는 패배와 무의미의 태도를 선택한다. 이 말은 영화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대런 애로노프스키 그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말하자면 <레퀴엠>이 물리적인 중독을 경험하게 하는 영화라는 것을 깨끗이 인정하고 난 뒤에도,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망설이게 된다. 과연 어지러운 삶과 세계의 환부를 드러내는 정신의 중독이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고통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혹은 물리적인 중독을 통해 걸어들어간 환각의 세계, 그 안에서 진실과 모순에 대한 질문을 마주치지 않는다면 다 무슨 필요란 말인가. 그 물리적 중독의 강화가 궁극적으로 초대하는 가장 중요한 손님인 환각. <파이>에서 환각상태에 빠져 있는 맥스에게 강박적으로 다가오는 이미지는 뇌였으며, 그것은 곧 신에 대한 수학적 도전을 제기하는 맥스 자신에 대한 고뇌의 변형이었다. 그러나 <레퀴엠>에서 뇌는 그 의미가 사라진 채 전기충격기기 사이에 끼워져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한다. 또, 동공은 <파이>에서 정면으로 신의 존재를 응시하려는 의지로서 드러났다. 그런데 <레퀴엠>에서 그것은 쾌감을 확장하는 미세한 세포의 움직임일 뿐 다른 의미가 아니다. 신의 행세를 대신하고 있는 지상의 유혹(약)으로부터 대런 애로노프스키는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파이>에서 벌벌 떠는 손으로도 마침내 맥스는 약을 집어던진다. 그리고 컴퓨터 유클리드의 뇌관을 열던 그 드릴로 자신의 뇌를 파괴하고 만다. 이것은 패배일까? 혹은 자살의 몸짓일까? 하지만 깨달음에는 ‘유레카’라고 소리칠 수 있는 진리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뭇잎의 움직임에서조차 규칙을 찾으려던 맥스가 그 앞에 다시 서는 모습은 우리를 중얼거리게 한다. ‘엔소프’. 그러므로,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다음 영화가 <배트맨: 원년>인 것은 다시 한번 우리의 판단을 유예시킨다. 왜냐하면 배트맨은 신의 대리인들 중 가장 철학적인 전도사이며, 또한 가장 빠르게 쾌속 전진하는 과학자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믿어야 할지 모른다.정사헌/ 영화평론가 taogi@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