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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터를 켜라>의 장항준 감독이 쓴 `눈물나는`제작일지(2)
2002-07-19

NG인지 OK인지 아무리 봐도 모르겠네 에라, 큰소리로 OK

감독이라는 게 이런 엿 같은 일도 해야 하는 거구나

>> 2001년 8월2일

시나리오는 결국 조연 캐릭터를 좀더 살리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무엇보다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다음 단계는 캐스팅. 번번이 낙오했던 관문이었다. 관수 형은 차승원부터 찍었다. 안면이 있다는 것이 유일한 무기였다. 그런데 그가 흔쾌히 출연 제의를 받아들였다. 복권에 당첨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하늘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이제 영화의 쌍두마차인 봉구 역만 결정하면 큰 산을 넘는 거다. 가장 먼저 해효 형의 주름진 얼굴이 떠오른다. 이튿날, 곧장 전화부터 했다. “형, 이번에 같이 한번 안 해볼래요.” “좋아, 장항준! 한다. 난 너랑 무조건 한다.” 아직 시나리오를 보지도 못한 형은 쉽게 응낙했다. <은실이> 촬영장에 놀러갔을 때 만나 이후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됐던 해효 형과 촬영장에서 감독과 배우로 만난다는 건 나한테는 더없는 기쁨이었다.

>> 2001년 8월14일

“돈을 벌긴 벌어야 할 거 아니야?” 다들 반대가 심하다. 권해효보단 김승우가 좀더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김승우씨쪽에서 출연 의사를 밝혀오면서, 난 궁지에 몰렸다. 내 편을 들어준 건 박정우 혼자뿐이다. 괴롭다. 해효 형에게 죽을 죄를 졌다. 해효 형을 만나 빌고 또 빌었다. 형은 다음에 보자고 자신은 괜찮다고 했다. 감독이라는 게 이런 엿 같은 일도 해야 하는 거구나. 내 뜻이 아닌 결정을 전달하면서, 난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다. 풀이 죽은 나를 관수 형과 정우가 위로하지만, 별로 도움이 되질 않는다.

>> 2001년 9월3일

관수 형이 큰건 했다. 김성복 촬영감독, 신학성 조명감독, 김원용 녹음기사까지. 쟁쟁한 스탭들을 한데 끌어모았다. 어떻게 모셨느냐고 물었더니 온갖 잘난 척은 다 한다. 대단하다고 치켜세우긴 하지만, 기고만장하는 모습이 재수없어 보이기도 한다. 출연을 결정한 김승우씨는 시나리오에 푹 빠지지 못한 눈치다. 도장을 찍고서, 김승우씨는 봉구가 왜 라이터에 그토록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내 입장에선 <예스터데이>에 겹치기 출연을 하는 그와 함께 가야 한다는 게 부담이다. 솔직히.

>> 2001년 10월6일

배우, 스탭들 모두가 상견례를 가진 날. 부담감이 밀려온다. 술자리의 흥이 고조될수록 이 영화가 안 되면 그건 전부 장항준이라는 못난놈 탓이라는 부담감이 해일처럼 밀고들어온다.

>> 2001년 11월12일

첫 촬영이다. 약간 떨리기도 하지만 팽팽한 현장의 긴장감이 나를 포위한다. 얼마나 기다려왔던 날인가?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날이기도 하다. 철곤과 국회의원인 박용갑이 클레이 사격장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대장정이 시작됐다. 잘 찍은 건가? 모니터를 봐도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나의 ‘컷’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전 스탭과 배우들이 나를 본다. 빨리 결정을 해야 한다. NG인지 OK인지. 그러나 아무리 다시 봐도 잘 모르겠다. 나를 보는 그들에게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하고 싶지만, 내 입에선 벌써 OK라는 외침이 터져나오고 있다. 너무 크게 외친 건가. 아냐, 크게 외치면 자신감이라도 있어 보이지. 하여튼 나보고 잘하고 있다고 하는 사람은 관수 형뿐인 것 같다. 스탭들 표정은 ‘왜 저래’ 하는 상인데.

>> 2002년 1월7일

김승우 선배의 스케줄이 좀 꼬인 거 빼고는 모든 게 순조롭다. 무엇보다 현장에서 김성복 촬영감독님, 신학성 감독님을 중심으로 스탭들이 똘똘 뭉친 게 원동력이다. 고맙고 의지가 되는 분들이다. 고개를 갸우뚱할 때마다 잘하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등을 두드려주신다. 집에 있는 마누라 은희의 문자 메시지도 큰힘이다. 전엔 매일 집에 처박혀 있다가 생이별을 한 지 벌써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보고 싶어 죽겠다는 메시지가 혹시 스탭들에게 노출돼서 닭살이라고 왕따당할까봐 최대한 마누라와의 교신을 은밀히 즐긴다.

>> 2002년 1월28일

리딩할 때부터 열심이더니, 차승원은 갈수록 에너지를 쏟아낸다. 처음 만난 날이었던가. 문어체 대사를 원래 싫어하니까 그냥 쉽게 입에서 나오는 대로 가도 좋다고 했더니, 그는 자신도 그런 생각을 했다면서 시나리오를 고쳐왔다. 고3 수험생처럼 그는 시나리오를 무슨 글씨인지 모를 정도로 새까만 뭉치로 만들어왔다. 그런 그가 요즘은 현장에서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내놓느라 골몰하고 있다. 그나저나 승우 선배의 <예스터데이>는 언제 촬영이 끝날까? 11월에 끝난다던 촬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 2002년 2월4일

김채연씨가 드라마를 하기로 했단다. 기가 막힌다. 내가 그렇게 영화에만 전념해달라고 부탁했건만. 매니지먼트 팀장인지 뭔지가 하라는 대로 결정한 것이다. 모두가 영화에 모든 것을 거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는지. 화가 나지만 참는다. 참는 것도 감독이 할 일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 2002년 2월11일

벌써 14일째 세트촬영이다. 기차 내부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을 몰아찍고 있다. 처음엔 계획대로 진행됐는데, 보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늦어도 밤 8시면 끝났던 촬영이 새벽까지 이어진다. 그야말로 생지옥이다. 하루에 적게는 80컷부터 많게는 100컷까지 소화한다. 촬영이 끝나면 서로에게 “남기남 감독님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한다. 이준택 프로듀서가 한약방하는 장인어른에게 부탁한 보약도 강행군 앞에서는 별 소용이 없다. 사흘만 참자, 그럼 집에 갈 수 있다는 다짐으로 긴 하루를 닫는다.

불의의 사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2002년 2월28일

전체 분량 중 80%를 찍었다. 16일간의 세트촬영이 70%를 차지했으니, 단기간의 노동강도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 났을 것이다. 촬영을 끝나고 목욕탕에 가서 체중을 쟀더니 세상에 7kg이나 빠졌다. 세트에서 보낸 16일 동안 내 살 중 7kg이 어디론가 도망을 간 것이다. 가뜩이나 삐쩍 마른 몸에 7kg이 보고없이 출타를 하다니. 거울 속의 난 다른 사람 같아 보인다. 영락없는 해골이다. 외부 기차신들 찍고 나면 촬영은 쫑이지만, 내 몸무게는 더욱 줄어들 것이다.

>> 2002년 3월13일

경찰서. 하루종일 조사를 받고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오늘 새벽 촬영 도중 우리 배우 한분이 돌아가신 것이다. 플랫폼에 경찰들이 정렬해 있고, 그 앞을 열차가 빠른 속도로 지나치는 장면이었는데, 열차 레일 안으로 배우 한분이 빨려들어간 것이다. 그 일이 벌어지고 나서, 난 지금까지 조사를 받고 있다. 무슨 말을 내가 하고 있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세수를 안 했다는 생각에 경찰서 화장실에서 잠시 세수를 하다 말고 돌아가신 분의 명복을 빌었다.

>> 2002년 3월15일

이틀째 아니, 사고가 발생했던 날 촬영을 하면서 밤을 샜으니 정확히 사흘째 한잠도 못 잤다. 퀭한 눈을 하고서 유족들을 만났다. 달리는 기차 안에 있었던 난 고인의 마지막을 보지 못한 터라 그분들한테 설명조차 드리지 못한다. 나를 원망하는 유족들. 어찌 됐거나 나는 죄인이다. 난 어떻게 될까. 이럴 때 관수 형마저 없었다면. 붙잡을 기둥이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된다. 다시 영화를 할 수 있게 된다면 이 사람과 평생을 가야겠다고 다짐한다. 뒤늦게 소식을 들으신 아버지가 밤에 전화를 하셨다. “걱정마라. 니 뒤에는 아버지가 있다.” 일흔이 넘은 아버지의 음성을 듣자마자 눈물이 왈칵 솟는다. 동시에 내 꿈이 저 멀리 사라져가는 듯하다.

>> 2002년 4월4일

일단 찍은 분량으로 편집부터 하자고 나섰지만 일이 손에 잡힐 리 없다. 지금 상황으로선 앞으로 촬영이 재개될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한 듯 보인다. 지원을 약속했던 철도청에서 사고가 일어나자 난색을 표하고 있는 것이다. 차승원까지 나서서 철도청 간부들을 만나고 다닌다. 내 인생 최대의 위기다.

>> 2002년 5월16일

사고로 두달 동안 중단됐던 촬영이 유족들과의 원만한 합의로 다시 진행된 지 3일째다. 가라앉은 현장 분위기가 좀처럼 뜨거워지지 않는다. 다들 잠을 설친 얼굴들이고, 몇몇 여자 스탭들은 악몽에 시달린다고 한다. 나 역시 겁이 난다. 또 사고가 나면 어떡하지. 외부 기차신 중 위험한 장면은 빼고 가기로 했다. 특히 경찰특공대가 기차를 저지하는 장면은 긴장감을 최대한 배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장면이었으나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촬영일정이 밀리는 것이 왠지 예감이 안 좋았다. 오야지들과 상의해서 “이거 찍지 말라는 계시인가보다. 아깝지만 포기하고 가자”라고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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