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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영화가 익어가는 동안
글 송경원 2026-10-13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며칠째 데일리 잡지를 제작 중이다. 매일 새벽 2시까지 마감하면서 몸도 마음도 지쳐갈 무렵, 영화제에서 일하는 분과 짧게 밥을 먹었다. 서로 초췌해진 얼굴을 마주보며 방금 본 영화 이야기로 운을 띄웠다. 이건 재미있더라. 그건 좀 아쉽더라. 저건 꼭 봐야 한다. 한참을 떠들던 그분이 문득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영화 이야기만 하니 너무 좋다.”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영화제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정작 영화 이야기만 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어쩌면 영화제를 찾은 수많은 관객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객석에 앉아 영화를 즐기는 사람에게도 극장 밖으로 나가면 각자의 일과 사정과 무게가 기다리고 있다. 잠시 그것들을 내려놓고 영화 이야기만 해도 되는 시간. 어쩌면 영화제가 주는 가장 사치스러운 선물은 그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무렵이면 영화가 익는 소리가 들린다. 기억은 계절과 장소에도 쌓이나 보다. 20년 넘게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부산국제영화제에 길들여진 몸이 되었다. 가을바람이 불면 조건반사마냥 부산에서 영화를 만나야 한다. 나는 늘 이 만남에 인연이 있다고 믿어왔다. 어떤 영화를 보았는지만큼 어디에서 언제 누구와 보았는지가 중요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같은 영화라도 새로운 관객을 만날 때마다 각자의 유일한 기억으로 완성된다. 앞으로도 수없이 반복될, 변하지 않는 한편의 영화가 서로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각자의 유일무이한 시간과 경험을 피워내고 있는 셈이다.

영화제는 첫 출발의 장인 동시에 첫 만남의 장소다. 오랜 시간 품고 만든 영화를 처음 내놓는 사람의 마음을 어찌 다 짐작할 수 있을까. 우호적인 관객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부풀어 오른 마음을 충분히 가라앉히지는 못할 것이다. 첫 상영의 기억은 다시 만들 수 없다. 그날의 박수와 침묵과 질문이 한편의 영화에 처음으로 바깥의 시간을 새긴다. 그 뒤로 영화는 각자의 길을 걷는다. 어떤 영화는 멀리 가고 어떤 영화는 뜻밖의 장소에서 다시 발견된다. 그 출발점에 잠시 함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문득 벅차 오를 때가 있다. 그 와중에도 평가하고, 별점 매기고, 줄 세우고 있는 게 영화기자의 업보다. 모두가 같은 영화제를 통과하지만 다 제각각의 길을 걷는다. 감독과 배우와 관객과 프로그래머와 기자의 경로가 며칠 동안 기적처럼 겹쳤다가 다시 흩어질 것이다.

축제가 계속되려면 누군가는 할 일을 해야 한다. 영화를 틀고 자막을 확인하고 관객을 안내하고 질문을 준비하며 밤새 기사를 마감하는 사람들이 있다. <씨네21>의 몫도 있다. 흩어지는 이야기를 모으고, 서로 다른 판단을 부딪치게 하며,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이 조금 더 오래 머물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상영은 끝나지만 영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영화는 조금씩 다른 맛과 색을 얻는다. 그렇게 우리 안에서 영화가 익는다. 이번 주에도 할 일을 하려 한다. <가능한 사랑>을 둘러싼 이야기를 이어가고, <암살자(들)>앞에서 다시 의견을 나눈다. 부산의 가을이 지나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간 뒤에도 지금 나눈 말들이 어딘가에 남아 다시 영화를 꺼내 보게 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영화 이야기를 실컷 할 수 있는 이 귀한 계절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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