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5일 또는 6일은 독립운동가 박상희의 80주기다. 아직도 낭설이 떠돈다. “공산당원이었다.” “남로당(남조선노동당) 소속이었다.” 가까운 동지들 몇몇은 공산당원이었고 선생도 일제의 공산당 관련 수사를 받았지만, 그의 공산당 활동을 증명하는 자료는 없다. 남로당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창당되었다. 선생은 해방 즈음 건국동맹 구성원이었다. 여운형 계열의 ‘비공산계 좌익’이었을 수 있다. 지역사회에서는 진보적 민족주의/사회민주주의/공산주의의 구분선이 흐릿하기도 했다. 선생의 운동 입문은 ‘구산구락부’였다. 청년운동과 형평운동을 북돋았고 좌우합작단체 신간회에 참여했다. 선생은 수리조합의 농민 착취에 맞서기도 했고, 언론인으로서는 경북보도협조망에 가담해 지역 운동을 지원했다. 목숨을 건 타도 투쟁은 아니었지만(구미에는 폭탄 의거를 벌인 인물들이 여럿 있었다), 실력양성론이나 애국계몽을 넘어선 변혁운동이면서, 당파성보다 풀뿌리를 중시했다.
한동안은 대구 10월 봉기 때 선생이 구미 지역 봉기를 선동했다고 알려졌었다. 하지만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집에 돌아온 그가 밥숟갈을 뜨자마자 봉기 소식이 들려왔고, 사태 중재를 위해 숟가락을 놓고 집을 떠난 것이 유족들이 본 그의 마지막이었다. 구미는 다른 경북 지역에 비해 살상이 적었다. 봉기 인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선생은 경찰관 처단을 막아섰다. 이는 봉기 참가자들에게 가해질 보복을 예방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선생은 살아남지 못했다. 충북 옥천에서 파견된 경찰이 그를 저격했다(오인 사격설도 있다). 그 사건이 없었어도 무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구미에서 박상희 선생처럼 살상을 막은 최관호 선생은 ‘빨갱이 두목’으로 몰려 1946년 10월17일 경찰에 의해 즉결처분당했다.
선생의 사망과 남로당 사건 이후, 동생 박정희의 행보는 묘하다. 북한의 남침 징후를 포착했던 그는 6·25 당시 구미에 있었다. ‘어머니 제사’ 때문이라지만 그의 모친이 별세한 날은 8월12일이었다. 서울로 복귀한 그는 수원 육군본부로 이동할 때, 처음에는 동료들과 섞이지 않다가 따로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는 설이 있다. 정치학자 이완범의 과감한 추론이다. “적어도 월북을 고민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완범은 5·16 세력이 거사가 실패할 경우 제3국 또는 북한으로 망명하려고 했다는 설을 거론하기도 했다. 나는 이따금 상상한다. 대통령이 되고 난 후에도 박정희의 내심은 좌익이었다면? 남로당 출신 탈북자 박갑동은 자신을 만난 대통령 박정희가 “박헌영 선생”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증언했다. 월북해 북한의 2인자가 된 박헌영이 끝내 숙청당한 반면, 박정희는 남한에서 정권을 접수해버린 걸까. 박정희의 정책은 칠레 피노체트 정권의 시장주의와는 대조적인 국가 주도 방식이었고 미국과도 긴장을 빚었다. 지나친 비약이겠지만, ‘자본의 옷을 입은 스탈린주의자’라는 규정을 만지작거려본다. 분명한 것은 박정희가 박상희의 꿈에 다가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박정희의 수단이자 목적은 국가 폭력이었다. 박상희는 사회와 공동체, 아래의 힘을 믿었다. 박정희의 길은 박정희로 끝나는 것이 옳았고 그리 될 수밖에 없었다. 박상희의 길은 오늘날 이 지역 저 마을에서 이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