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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셀프 카메라’라는 우정의 매개, 김예솔비 평론가의 <반칙왕 몽키> <미명> <소영의 노력>
글 김예솔비 2026-09-09

<반칙왕 몽키>

셀프 카메라는 ‘나’를 찍는 카메라일까? 여기서 ‘셀프’는 두 가지를 의미하는 동시에 강조하는 것일 테다. 카메라를 든 자가 화면 안에 자신의 모습을 (잠재적으로) 드러낸다는 점,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카메라를 최대한 간소화된 형태로 운용해야만 한다는 점. 이런 이유로 ‘셀프 카메라’는 종종 자전적인 영화, 다이어리 필름 등과 쉬이 구분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셀프 카메라는 그 이름이 주는 암시와는 달리 전적으로 ‘나’ 혹은 자아의 구성에 대한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셀프는 ‘나’를 기술하는 방법론인 동시에 ‘나’를 도구화하여 셀프와 카메라의 방법론적 위상을 거의 일치시키려는 (불가능에의) 시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 잠복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가 매체가 되고자 하는 욕구다.

거의 모든 영화가 그렇긴 하지만 셀프 카메라는 조금 더 절박하게 누군가와의 연결을 호소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와 세상, 나와 너, 나와 내가 아닌 모든 것들.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 카메라를 들게 하거나 스스로를 카메라 앞에 두고 싶어 하는 충동과 거의 다르지 않음을, 두 가지가 긴밀하게 이어져 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카메라를 든 자가 홀로 있다는 사실이 거듭 강조되는 셀프 카메라의 양식은 그의 내적 발화를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우리를 가져다둠으로써 공동의 비밀이 축조될 수 있는 밀실을 만든다. 우리는 그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다. 그는 최대한 소리를 바깥으로 흘리지 않으려 하지만, 그러기 위해 자신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어 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셀프 카메라는 나의 취약함, 더 나아가서는 영화의 취약함을 선취하는 행위다.

근래에 개봉한 세편의 영화 <반칙왕 몽키> <미명> 그리고 <소영의 노력> 은 모두 연출자 자신의 삶을 긴밀하게 보여주는 영화는 아니지만 셀프 카메라의 형식을 취하거나 적어도 인용하고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찍은 영상이 삽입된다는 점, 혹은 연출자가 자신의 집에서 직접 카메라를 운용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먼저 에서 셀프 카메라는 극 중 몽키가 직접 일상 속에서 찍은 영상으로 등장한다. 전형적인 다큐멘터리의 인터뷰 구도로 말하는 장면도 있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몽키가 스마트폰으로 찍은 것처럼 보이는 영상이다. 몽키는 스케이트보드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달리는 중이고, 카메라는 그의 간소화된 이동을 따라 가벼워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몽키가 포대기에 막내를 업은 채 스케이트보드를 타면서 이동하는 장면이다. 이런 장면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의 장르는 일종의 스케이트보드 필름처럼 보이기도 한다.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매끄럽게 질주하는 장면만큼이나 스케이트보드 필름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은 스케이트보드를 타다가, 혹은 기술을 시도하다가 넘어지는 장면이다. 여기서 보더가 넘어지는 것은 촬영을 중단해야 하는 이례적인 사고가 아니라 스케이트보드 필름의 문법으로 자연스럽게 수용된다. 보더는 다시 털고 일어나 제 갈 길을 가거나 아쉬워하거나 한바탕 너털웃음을 터뜨려버린다. 실패를 형식화하는 방식 중에서 스케이트보드 필름은 가장 간소하고 유쾌한 방법 중 하나다.

물론 <반칙왕 몽키>에서 몽키는 스케이트보드를 타다가 넘어지지 않는다. 스케이트보드보드 위에 수레처럼 얹은 짐들이 쓰러질 때는 있어도. 아이를 업고 있는 몽키는 무모한 기술을 시도하지 않는다. 대신 이 영화에서 넘어짐이라는 장치는 ‘반칙’이라는 규칙으로 우회한다. 영화는 안나와 몽키의 가족이 살아가는 모습을 반칙이라고 설명한다. 사남매 키우기, 전업주부인 남편, 아이들을 등하교시키고 아이들의 삼시세끼를 챙기는 아빠, 대안교육의 현장, 돈을 들이지 않고 생활하기 등. 언뜻 보기에는 낙천적으로 이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생활의 이면에는 이를 유지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고충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충들은 결코 반칙의 즐거움을 상쇄하지 못한다. 그 고충들은 삶이나 영화를 중단해야 할 계기들이 아니라 자연스레 수반되는 사건들일 뿐이다. 물론 그 고충을 결코 축소해서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영화에서 반칙이 지닌 낙천성은 한 사람의 유별난 성정을 넘어 제도와 정상성의 돌파구로 제시된다.

<반칙왕 몽키>에서 몽키가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는 셀프 카메라 영상들은 전업주부로서 그가 살아가는 내밀한 생활을 비춘다. 정관수술을 상담받거나 아이를 안은 채 요리를 하고,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산책을 하는 몽키. 셀프 카메라는 커다란 장비가 파고들 수 없는 그의 활달함과 액션을 생생하게 보여주지만, 동시에 카메라를 든 자가 자신의 일부를 내보임으로써 스스로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 형식이기도 하다. 타자에 의해, 응시와 관찰에 의해 취약함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취약함을 스스로 형식화하는 셀프 카메라는 영화 보기라는 활동 속에서 그 취약함의 편에 서도록 하는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이를 우정의 공동체라고 불러보자.

<미명>

비슷하고 또 다른 맥락에서 <미명>은 화면 안에 있는 요소들간에 맺어지는 우정에 관해 생각해봄직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반칙왕 몽키>의 경우처럼 인물이 카메라를 들고 나타나는 셀프 카메라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는 않지만, 연출자가 직접 인물로 분하며 동시에 카메라를 운용했다는 점을 미루어 셀프 카메라의 범주에서 떠올려볼 수 있다. <미명>은 흔히 이야기되는 것처럼 ‘가내수공업’ 영화이기도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홈무비라고도 볼 수 있을 테다. 대개 홈무비의 많은 문법과 양식들은 관찰과 기억의 충동에서 추동한다. 이때 얼굴을 기록하는 것은 홈무비의 손쉬운 기호가 된다. 하나 홈무비인 동시에 극영화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미명>에서 셀프 카메라로서의 흔적은 역설적으로 얼굴이 아니라 얼굴을 가린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이 영화에서 원영과 정은은 얼굴을 쉬이 드러내지 않는다. 이를 두고 홈무비에 자신의 존재감을 지우고 개입을 최소화하려는 (극영화적) 연출가의 관성이 투영된 것이라고 말해보면 어떨까. 이 영화의 셀프 카메라가 지닌 미덕 중 하나는 카메라의 권위를 슬그머니 탈각시킨다는 데에 있다. 저 흐릿하고 모호한 형상을 기입하는 곳으로서 카메라는 거울처럼 일상적으로 몸을 비치는 도구이지 어떤 스펙터클을 생산하는 도구가 아니다.

<미명>의 탁월한 점은 화면에서 인물의 위상을 최대한 축소하면서 그 대신 화면 중심적이고 시각 의존적인 체계가 아닌 다른 형태의 극의 양상을 고안한다는 데에 있다. 의 첫 장면을 다시금 떠올려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나란히 누워 패드로 영상을 시청하고 있는 아이들이다. 그 뒤로 식탁에 둘러앉은 어른들이 나누는 술자리 대화의 내용이 어렴풋하게 들린다. 아이들은 화면의 전경에 크게 등장하고, 어른들은 후경에 흐릿하게 나와 대화를 나눈다. 이 장면은 이 영화에서 이미지와 사운드간의 관계를 느슨하게 예비한다. 이 영화에서는 보이고 들리는 것이 일치하는 싱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둘의 불일치 사이에서 공명하는 감각이 더욱 우선시된다. 보다 정확히는 보이지 않는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는 것이 중요해진다. 이때 사운드는 이미지를 위해 복무하거나 서브텍스트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독립적으로 기능하게 된다. 화면의 요소들이 우정을 나눈다는 것은 이런 의미가 아닐까. 연출가가 영화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최대한 희박하게 만들려는 관습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화면과 인물 사이의 모종의 긴장은 이미지와 사운드를 자연화된 위계로부터 탈각시킨다. 이로써 계엄이 선포된 다음날 일어난 아내의 사고 이후 더이상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인물의 드라마적인 설정이 수용되기도 하는 것이다.

<소영의 노력>

한편 <소영의 노력>은 이 지면에서 언급하고 있는 영화들 중 우리가 아는 가장 익숙한 방식의 셀프 카메라가 쓰인 사례다. 물론 이 영화에서 셀프 카메라는 우리가 수신할 수 있는 메시지의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몸짓의 총체는 셀프 카메라라는 형식적 분류로는 축약되지 않는다. 영화의 전반부는 소영이 공연을 위해 안무 연습을 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그 후 소영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촬영한 분량은 일종의 약간 긴 에필로그처럼 삽입된다. 일반적으로 공연의 여정을 강조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안무 연습 과정과 교차하며 셀프 카메라 영상이 삽입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여기서 자연스럽다고 함은, 통상적으로 많이 쓰는 방식이라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삶이 구획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공연과 일상. 하지만 <소영의 노력>에서 시간은 그런 식으로 나뉘지 않는다.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 소영의 삶은 잠시간 공연과 거의 일치된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가 연습실을 벗어나 소영의 내밀한 공간으로 향하는 순간은 영화상에서 소영이 공연을 마친 이후다. 우리에게 말을 걸 수 있을 때, 어떤 순간을 골라 기다렸다는 듯이 셀프 카메라가 등장한다.

어느 날 소영은 차를 타고 엄마가 일하는 장애인 시설에 간다. 카메라로 시설을 찍으면서 소영은 시설을 찍는 것이 아니라 풍경을 찍고 있는 것이라 거듭 강조해서 말한다. 이 둘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적어도 소영은 그 차이를 알고 있을 것이다. 셀프 카메라는 단지 카메라를 든 자의 시선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를 든 자의 위치와 그가 말하고 있는 자리, 그가 눈앞에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자신의 말 속에 모두 끌어안아 보여주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때 소영의 말은 아마도 추후에 이 장면을 편집하게 될 감독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했을 것이다. 소영은 사람들이 자신이 말을 하면 종종 못 알아듣지만 춤을 출 때는 모두 알아듣기 때문에 춤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셀프 카메라는 발화로 전달되지 않는 시선과 시선의 잠재적 오류들을 모두 자신의 발화로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정제되지 않은 채로 실어나른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셀프 카메라 영상은 단지 사족 같은 에필로그가 아니라, 앞서 소영이 춤으로 했던 모든 것들을 영화로 다시 시도하고자 하는 영화적 발화의 모색에 대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소영의 말과 눈, 입에서 쉬이 꺼지지 않는 불꽃을 본다.

셀프 카메라 앞에서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영상이 흔들리고, 카메라를 든 이가 넘어지고, 의도하지 않은 것이 화면에 들어온다. 하지만 앞서 소영의 춤을 그 자체의 언어로 받아들였던 우리는 이제 그녀의 영상을 결함이나 부족함이 아닌 하나의 몸짓으로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영화는 그녀의 춤에서 찾았던 것을 그녀의 영상에서도 발견하도록 이끈다. 춤과 카메라를 대담하게 겹쳐보고자 하는 이 영화의 시도 속에서 셀프 카메라는 지극히 모험적인 형식이다. 여기서 우정이라는 말을 다시 가져와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섣불리 소영의 편이 되라고 종용하는 대신 조심스럽게 형성되는 우정의 경로를 발견하는 절차를 영화적 경험으로 내어준다. 이때 우정은 상대를 이해했다는 선언이나 상대의 편에 선다는 적극적인 표명이기보다는, 그가 지닌 취약함을 하나의 온전한 언어로 받아들이는 일로 거듭난다.

셀프 카메라는 혼자 있는 사람을 보여주는 형식이면서 동시에 그를 혼자 두기 위해 만들어진 형식이다. ‘셀프’는 자신의 안쪽으로 닫히기 위한 말이라기보다 자신을 매개로 바깥과 연루되기 위한 말일 수 있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셀프 카메라는 ‘나’를 찍는 카메라일까? 부분적으로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나’는 목적이나 대상이라기보다 수단에 가깝다. 나는 나를 찍지만, 나를 찍거나 내가 보고 있는 것을 찍는 행위를 통해 눈앞의 세계와 자신이 말하고 있는 자리, 자신이 감추고 싶은 것과 보여주고 싶은 것을 함께 건넨다. 그리고 이를 통해 촉발되는 우정은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그 대신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의 취약함을 건네는 순간 그것을 함부로 돌려보내지 않는 일이다. 이제 우리는 자신에게 말을 거는 독백을 닮은 편지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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