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er
Jackson Special
피터 잭슨은 <반지의 제왕>으로 제왕의 자리에 올랐다. 과장이 아니다. 엽기적인 상상력과 피가 튀는 코미디로 종횡무진하던 피터 잭슨이, 그 웅장한 신화의 세계를 온전하게 창조할 것이라고는 쉽게 생각하지 못했다. 서구사회에서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반지의 제왕>은 피터 잭슨의 상상력을 거쳐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다. 피터 잭슨 역시 과거에 오르지 못했던, 새로운 봉우리 등정에 성공했다. 할리우드 진출작인 <프라이트너>의 맥빠짐과는 달리, 할리우드의 자본으로 뉴질랜드에서 만든 <반지의 제왕>은 기운이 넘친다.<반지의 제왕> 이전까지, 피터 잭슨은 ‘컬트’감독이었다. 소녀들의 일탈과 몽상을 그린 <해븐리 크리쳐스>가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보통 사람들의 선(線)을 마음대로 뛰어넘는 엽기적인 영화들이었다. 사람을 식용으로 쓰는 외계인이나 좀비와의 구역질나는 식사, 도박과 섹스에 몰두하는 추악한 인형들. 피터 잭슨의 영화는 한번 보면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피터 잭슨이 그려내는 장면은, 강렬하게 오감을 자극한다. <해븐리 크리쳐스>에서 50년대 소녀들인 줄리엣과 폴린은 ‘상상’을 한다. 성이 있고, 왕자와 공주 그리고 악마가 있는 가상의 공간을. 그들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인형을 만들고, 모래밭에 성을 짓는다. 그들의 상상 그대로, 피와 살을 얻는다. 물론 줄리엣과 폴린의 머릿속에서 가능한 것이지만, 우리는 그들의 상상을 스크린으로 보게 된다. 피터 잭슨은 그들의 상상을 스크린으로 불러오는 영매인 것이다.
이번 부천영화제 피터 잭슨 회고전에서는, 그의 상상력이 종횡무진으로 치솟던 초기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스크린으로 만나기 힘들었던, 아니 불가능했던 초기작들은 피터 잭슨의 영화 편력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흔히 피터 잭슨을 ‘공포’영화 감독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영화에서 웃음이 빠져본 적은 단 한번도 없다. 피터 잭슨의 영화는 끔찍해하거나, 두려움에 떠는 것이 아니라 낄낄거리며 손사래를 치는 것이 적합하다. 스스로도 ‘나는 코미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다만 그 웃음의 방식이 평범하지 않을 뿐이다. 청바지를 입고 뒤뚱거리는 좀비를 외계인이라고 우기고, <사이코>의 공포스러운 모자관계를 웃음의 대상으로 역전시킨다. 피터 잭슨은 패럴리 형제가 유행시킨 ‘화장실 유머’의 본질을 이미 알고 있었다. 게다가 피터 잭슨은 음흉하지도 않다. <포가튼 실버>에서 드러나는, 피터 잭슨의 유머감각은 유별나지만 전통에서 어긋나지 않는다. 전통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지만, 피터 잭슨은 전통이 지켜온 웃음의 코드를 이미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리고 그걸 뛰어넘어, 엽기적인 웃음을 선사한다.
애초에 피터 잭슨은 주류에서 길들여질 수 있는 감독이 아니었다. 그는 주류의 감성을 끌고 들어와 자신의 영역 안에서 포섭해야만 하는, 자기중심적인 감독이다. <반지의 제왕>이 요구한 것도 그렇다. 매끈하게 이야기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거친 영토에서 벌어지는 판타지의 모험을 에너제틱하게 그려내는 것. 이번에 만나는 피터 잭슨의 초기작에서, 그 에너지의 원초적인 형태를 느낄 수 있다.김봉석/ 영화평론가
◆ 배드 테이스트 Bad Taste
감독 피터 잭슨출연 피터 잭슨
뉴질랜드 / 1988년 / 88분
직장을 다니던 피터 잭슨이 다시 영화계로 진입하기 위하여 친구들과 함께 틈틈이 만든 SF고어영화. 어느 날 갑자기 해변의 작은 마을에서 주민들이 사라지고 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좀비 같은 사람들이 배회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지구인을 식용으로 쓰기 위해 지구로 온 외계인들이다. 괴상한 외계인에 맞서 싸우는 외계인 수색 방위대가 있다. 그들의 기관 이름은 바로 AIDS(Alien Investigation and Defence Severce). <배드 데이스트>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어처구니없는 특수효과를 이용하여 엉망진창의 SF영화를 만들어낸다. 저예산이기도 하지만, 의도적으로 조악하게 만든 영화의 전범을 <배드 테이스트>에서 볼 수 있다. 뒤죽박죽이지만 에너지가 넘치고, 자극적이면서도 유쾌한 피터 잭슨 영화의 시작을 알린 영화.
◆ 해븐리 크리쳐스 Heavenly Creatures
감독 피터 잭슨
출연 멜라니 린스키, 케이트 윈슬렛
뉴질랜드 / 1994년 / 99분
피터 잭슨은 단지 기발한 상상력과 충격요법으로 일관하는 싸구려 감독이 아니다. 50년대의 뉴질랜드, 어머니를 살해했던 두 소녀의 우정과 사랑을 그린 <해븐리 크리쳐스>는 '공포' 전문으로 알려진 피터 잭슨의 은밀한 감성을 투명하게 내비친다. 지나칠 정도로 섬세하고 또 발작적인 <해븐리 크리쳐스>는 멜로와 판타지, 공포영화, 사회극, 심리 드라마 등을 유려하게 엮어내며 관객을 사로잡는다. 피터 잭슨 영화의 본질이 '판타지'임을, 지독한 현실의 사건을 통하여 입증한 영화.
◆ 굿 테이스트 Good Taste Made Bad Taste
감독 토니 하일즈
뉴질랜드 / 1988년 / 24분
<배드 테이스트>의 제작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제작, 연출, 촬영, 편집, 특수효과 등을 모두 맡은 피터 잭슨이 크레인을 비롯하여 직접 제작한 카메라 장비와 특수효과의 방법을 자세하게 소개해준다. 스탭이자 배우로 참여한 동네 친구들도 한마디씩 거들고, 피터 잭슨의 부모가 나와 어린 시절부터 자작영화를 만들었던 피터의 ‘이상한’ 어린 시절을 말해준다.
◆ 피블스를 만나요 Meet the Feebles
감독 피터 잭슨뉴질랜드 / 1989년 / 96분
아이들이 좋아하는 인형쇼의 앙증맞은 인형들이 섹스와 도박을 하고, 날카로운 칼로 목을 따고, 온갖 사기와 협잡에 물들어 있다면? <피블스를 만나요>는 피터 잭슨의 엽기적인 상상력이 극에 달한다. 피블스쇼의 주인공인 하마 하이디를 둘러싸고, 인형극 주변에서 벌어지는 음모를 그리고 있다. 스너프, 에이즈, 뇌물, 폭력조직의 결탁, 포르노, 살인, 황색 저널리즘 등 인간사회의 추악한 모든 양상을, 인형들의 뒤뚱거리는 율동과 함께 만날 수 있다.
◆ 브레인 데드 Braindead
감독 피터 잭슨출연 다이아나 페널버, 엘리자베스 무디
뉴질랜드 / 1992년 / 95분
피터 잭슨의 이름을 널리 알린, 스플래터영화의 고전. 미국 개봉시에는 <데드 얼라이브>라는 제목으로 공개됐다. <사이코>를 연상시키는 오래된 저택과 강박적인 어머니에게 꼼짝 못하는 소심한 아들이 등장한다. 슈퍼에서 일하는 파퀴타는 운명의 남자를 만날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파퀴타는 라이넬과 만나 데이트를 시작하지만, 장애물은 라이넬의 어머니. 라이넬의 어머니는 동물원에서 수마트라 원숭이에게 물린 뒤 좀비가 되어버린다. 효자인 라이넬은 좀비가 된 어머니를 지하실에 옮겨놓고 극진하게 대접하지만, 점점 좀비의 수는 늘어만 간다. 잔디깎기를 이용하여 끝없이 몰려드는 좀비들을 갈아버리는 모습은, 웃어야 할지 비명을 질러야 할지 어려운 명장면. ‘스플래터’가 무엇인지, <브레인 데드>를 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다.
◆ 포가튼 실버 Forgotten Silver
감독 피터 잭슨, 코스타 보우츠출연 피터 잭슨, 조니 모리스
뉴질랜드 / 1995년 / 53분
뉴질랜드 영화사를 재구성한 페이크 다큐멘터리. 피터 잭슨은 우연히 옆집에서, 세계 영화사에서 잊혀진 존재인 콜린 매켄지의 모든 것을 발견한다. 콜린 매켄지는 유성영화와 컬러영화를 처음으로 만들었고, 전성기의 할리우드를 능가하는 거대한 세트장을 세우기도 했으며, 몰래 카메라 기법도 가장 먼저 발견했다. 매킨지의 친구가 라이트 형제보다 먼저 비행기를 날리는 광경을 촬영하기도 했다. 피터 잭슨은 미라맥스의 사장인 하비 와인스타인, 영화배우인 샘 닐, 영화평론가인 레너드 말틴 등과의 인터뷰(이 유명인사들이 태연하게 거짓말을 해댄다) 그리고 살로메의 전설을 담은 영화를 찍기 위해서 지었던 밀림 속의 거대한 세트장을 찾아가며 콜린 매켄지의 역사를 더듬어간다.
◆ 거짓 뒤에서 Behind the Bull
감독 코스타 보우츠
출연 피터 잭슨
뉴질랜드 / 1995년 / 32분
‘가짜’ 다큐멘터리 <포가튼 실버>의 제작과정을, ‘진짜’로 찍은 다큐멘터리. <포가튼 실버>의 제작에 참여한 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하여 <포가튼 실버>의 제작과정을 짚어본다.
■ 쿠차 형제의 뉴욕 언더그라운드 영화
기발하고 촌스러운 초저예산 세계로
쿠차 형제를 알게 된 건 지난해 일이다. ‘블루무비’, ‘현대의 북한영화’ 등 흥미로운 프로그램들을 혼자서 독립적으로 큐레이팅하여 유럽의 영화제들에 소개한 바 있는 요하네스 쉔헤르라는 친구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맞는 컨셉이라며 적극 추천했다. 작품 시사는 어렵게 이뤄졌는데 라이프치히 시네마테크에서 일하는 친구 마크가 코펜하겐에 있던 프린트 소장자 잭 스티븐슨에게 프린트를 받아서, 자신의 극장에서 혼자 영화를 볼 수 있게 해주었다.와우! 쿠차 형제의 영화들은 정말 문자 그대로 자유분방한 독립영화 제작의 정수를 보여주는 단편들이었다. 현란한 컴퓨터그래픽과 어마어마한 예산으로만 가능할 것이라는 SF장르에 대한 고정관념은 이 소박한 아날로그 SF영화들로 인해 여지없이 깨졌다. 필름에 직접 그려낸 그 특수효과들을 보라!!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주체할 수 없지만 예산 부족 때문에 괴로워하는 영혼들이여, 쿠차 형제의 매혹적인 저예산영화의 세계를 맛보면 용기 백배할 것이다.
상영작 중 <벗고 있을 때 안아줘요>(Hold Me While I’m Naked)는 조지 쿠차가 할리우드행을 꿈꾸는 젊은 몽상가 감독을 맡아 열연하는, 영화 만들기에 대한 영화. 감독은 여배우에게 계속 옷을 벗고 있을 것을 요구하고, 왜 계속 옷을 벗고 있어야 하느냐고 여배우는 항변한다. 독립영화 현장에 대한 우스꽝스러우면서 슬픈 풍자가 담긴 영화. 조지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잘 알려진 영화이다. <웬델 샘슨의 비밀>(The Secret of Wendell Samson)은 마이크의 필모그래피에서 색다르고 다분히 개인적인 작품으로 성적 욕망에 관한 초현실적이고 어수선한 반추가 돋보이며 관계의 꼬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만화 같은 스타일의 ‘폭력적인’ 종말에 등장하는 레이저총은 셀룰로이드 필름을 직접 긁어내 얻어낸 ‘아날로그 특수효과’다. <플레샤포이드의 원죄>(Sins of the Fleshapoids)는 쿠차 형제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SF장르에 충실한 영화. 100만년 뒤의 미래: 인류는 핵전쟁에 의해 멸종되다시피 하고 살아남은 인간들은 태만하고 타락해 가고 있다. 인간 대신 모든 일을 맡아서 하는 로봇. 하지만 이 로봇들이 서로 사랑에 빠지면서 큰 혼란이 야기된다. 프레임에 직접 그려넣은 말풍선 등 기발한(!) 표현이 관람 포인트. 촌스러운 초저예산 판타지영화. 이 작품을 보고 존 워터스가 영화감독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고….김영덕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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