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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곽경택 인터뷰 [2]
사진 오계옥 정리 이영진 2002-07-05

Round4: 그 음악, 꼭 필요했나?

#67 버스 안

경미가 탄 버스를 따라 뛰는 득구. 그는 창가에 앉은 경미에게 자신의 옷의 이름을 보여주려 애쓰고, 이를 본 경미의 무안함과 달리 버스 안은 환호하는 승객으로 더 북적댄다.

박찬욱 | <친구> 느낌이 묻어나는 장면을 보니 반갑던데.

곽경택 | 달리는 거 말씀하십니까? 버스장면도 그렇고 전 되게 고민했는데. 형님은 안 그렇습니까?

박찬욱 | /나야 남의 영화 보니까 재밌던데. 뭐. (웃음) 근데 이 장면에서 갑자기 그 노래(<로보트 태권V>)는 왜 나와?

곽경택 | 그냥 그 장면을 찍다가 문득 생각나더라구요. 나도 모르게 넣은거죠.

박찬욱 | 여기서 그 노래를 쓴 건 오버 아니야? 전반적으로 음악은 좀 불만이야. 어우러지는 않으니까. 개별적으로 쓰인 노래들은 좋긴 한데, 정서가 하나로 모아지지가 않으니까. 후반부에 경미가 발 씻어주는 장면의 톤이 좀 튀어서 그렇지 그림은 그것 빼면 한 흐름으로 가는데, 음악이 따로 노니까 좀 그랬던 것 같애. 아, 질문 하나. 박종팔이 암표상하고 거래하는 장면은 내용이 뭐야?

곽경택 | 그때 4라운드, 6라운드 뛰면 개런티 대신에 좌석표를 줘요. 그런데 직접 팔러다니기 쪽 팔리니까, 그냥 암표상한테 헐값으로 넘기는 거죠. 그 직업을 가졌던 사람들만 이해하더라구요.

박찬욱 | 드라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지만, 애정이 가는 장면이 있을 텐데. 세계 타이틀 앞두고 사진 촬영하면서 뒤의 거치적거리는 후배들 보고 비키라고 하고 포즈를 취하는 장면인가?

곽경택 | 개인적으로는 아나운서가 중계할 때 뒤에서 V자를 그리는 중년의 아저씨. 연기하신 분이 동아대 의과대학 교수님이거든요. 근데 현상소 아저씨가 영화 보고서 실제 그 아저씨가 그 당시에 그런 짓을 자주 한 사람이 분명 맞다며 우기시는 거예요. (웃음)

Round5: 정말 김득구가 그 노래를 불렀나?

#88 거울 앞에 선 득구에게 훈계를 하는 관장

김현치:앞으로 니 눈앞에 있는 그 사람하고 싸워. 딱 한 사람만 이기면 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는 거, 그기 바로 인간 참피온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노래 하나 불러봐라.

김득구: 예?

김현치: 앞으로 니 눈앞에 보이는 그 사람하고 파인플레이 해야 되니까 서로 잘해보자고 노래 한곡 불러주라.

박찬욱 | 처음에 대사를 듣고, 이건 아닌데 싶었어. 근데 계속 듣다보니, 감독이 관장의 입을 통해서 뭔가를 말한다려고 한다기보다는, 그때 그 시절에 그 사람들은 정말 그런 이야기를 뱉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결정적인 순간에 애새끼들한테 잊지못할 교훈을 던져주겠다는 그런 심정 같은 거 있잖아.

곽경택 | 딱 그거죠. 사실 김현치 관장의 대사들, 위험해요. 공허하고. 특히 제목을 대사에서 읊는 것만큼 황당한 기 없는데. 그래도 밀어붙였던 건 이런 맥락이었어요. 그 당시 김 관장이 하는 거는 우리가 지금 조감독들한테 하는 이야기랑은 차원이 굉장히 다르다는 거죠.

박찬욱 | 그래, 맞아.

곽경택 | 문제는 요즘 사람들이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도록 할 거냐, 그거였어요. 거울 앞에서 훈계하는 장면을 일부러 풀숏으로 잡은 것도 그래서예요. 김득구의 반응을 클로즈업으로 몇번만 잡아주고. 아무리 중요한 대사를 쳐도 김현치 얼굴은 절대로 안 따고 들어가고.

박찬욱 | 그건 잘한 거야. 정말.

곽경택 | 겁이 턱 들더라고요. 그 순간에.

박찬욱 | 게다가 마무리가 잘된 게. 노래 한번 불러보라고 하면서, 쓰윽 넘어가잖아.

곽경택 | 취재하다 자연스레 나온 거예요. 실제로 김현치 관장이 그렇게 노래를 시켰고. 그땐 <해변의 여인>을 불렀다는데. 극중에서 오성이가 부르는 조용필의 <>을 개사한 그 노래는 호주에 친구 이상봉씨한테서 첨 들었어요. 가라오케에서 그분이 “나 옛날에 득구랑 이 노래 참 마이 불렀다”면서 “권투란 무엇인가∼” 하는데에. 소름이 쫙 돋는 거예요. 과장된 에코가 나오는데 머릿속에서 어떤 그림이 그려지냐면 둘이서 굉장히 처절하게 싸우는 장면이 떠올랐고. 아, 그럼 이걸로 넘어가면 자연스럽겠다 싶었심다.

Round6: 어머니 얘기, 설명이 부족하지 않나?

#96 김득구 본가

동양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한 김득구, 그의 고향을 찾아 잔치를 벌인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그를 맞이하는 대신 부엌에서 몸을 쭈그리고 있다.

김득구: 사진 한장 안 박을래요?

어머니: 니나 많이 박으라.

김득구: 기분, 안 좋아요?

어머니: 너, 골병은 안 들었니.

박찬욱 | 어머니말이야. 좀더 설명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나라도 고민되겠다. 붙여놓으면 사족 같기도 할 테고.

곽경택 | 어머니의 드라마가 더 세요.

박찬욱 | 파란만장했겠지

곽경택 | 김득구, 이경미, 김현치, 어머니인 양선녀. 이렇게 넷 중 누가 가장 드라마틱한가. 엄마예요. 김득구가 사망한 지 정확하게 90일 만에 어머니도 세상을 뜨거든요. 자신의 목숨을 끊고. 원래 시나리오에선 어떤 장면을 넣어뒀냐면, 의식 불명 상태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어머니 양씨가 우리 아들은 죽었다라고 반복해서 되뇌거든요. 그렇게 아들 죽음을 인정해버리고, 돌아와서 어느 날 밭을 매고 있다가 홀연히 집으로 돌아가 마치 냉장고에서 시원한 환타 한병을 마시는 것처럼 장롱에서 농약을 꺼내 꿀꺽 삼키는 장면이 있어요. 근데 엄마 이야길 하기 시작하면, 너무 많은 드라마를 할애해야 했고, 그러다보면 김득구 스토리가 중심을 잃을 것 같고. 또 한 가지는 이 불쌍한 엄마까지 끌어들여서, 그것도 제대로 다룰 자신도 없는데, 굳이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안 찍었어요.

박찬욱 | 아마추어 배우를 쓴 건 전체적인 톤에 비춰봤을 때 튀어보이는데. <집으로…>도 아니고.

곽경택 | 기존 연기자는 정말 쓰기 싫었고, 아마추어는 그런데 훈련을 시켜야 되고, 그거 얼마나 어렵습니까. 한다 해도 정해진 프로덕션 안에서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더라고요.

박찬욱 | 영화 끝나고 자막으로 어머니와 관장, 약혼녀 등의 후기에 대한 설명을 쓸 생각은 안 했어?

곽경택 | 어떻게 됐다 하는 거 말입니까. 박종팔 같은 선수들이믄 몰라도 나중에 약혼녀한테 피해를 줄 것 같아서 싫었심다.

Round7: 김득구의 기고만장한 면모, 왜 제대로 안 그렸나?

#107 목욕탕

둑구의 등을 밀어주는 상봉.

이상봉: 올챙이 때는 물이 없으면 죽잖아. 이제 개구리 됐다고 지가 물찾아 갈 수 있으니까, 옛날에 물 대준 사람을 모른 척해. 그게 사람이야? 개구리지.

박찬욱 | 실제 김득구한테도 아름답지만은 않은 성격이 있었을 텐데. 동양챔피언 하고 나서 기고만장해 하는 행동에 대한 묘사가 좀더 되었으면 어떨까. 좀 빼고 가자고 맘먹었던 거야?

곽경택 | 유쾌한 사람이었고, 엔터테이너의 기질이 강했어요. 다만 사람들의 평가가 좀 갈려요. 이 사람에게 좋은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뭐 이런 식이에요. 그때 다 못살긴 했지만, 아무리 험한 밥을 줘도 너무 감사하게 먹는 순박한 사람이었다. 또 한쪽은 ‘득구, 마이 컸네’ 뭐 그런 거죠. 이상봉씨 말로는 후배들을 대하는 모습이나 그런 걸 보면 미울 정도로 싫었다고 하니까. 그래도 그분 약주만 하셨다 하면 스파링하면서 자기가 한방에 나가떨어져줬어야 했는데, 한 체급 작으면서도 그놈 미워서 일부러 끝까지 싸웠다고, 그래서 챔피언 벨트 못 딴 거 아닌가 미안해해요.

박찬욱 | 그거 만든 장면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구나.

곽경택 | 실제로 김득구는 점점 크고, 이상봉은 권투를 그만두게 되고. 그런 과정 속에서 두 사람 사이에 질투도 있었겠고. 복잡미묘한 사람의 심리가 안 들어갔겠습니까.

박찬욱 | 김득구에게 동양타이틀전 기회를 줄 때도, 영화에서 이상봉이 조금 서운해 하는 거 맞지?

곽경택 | 그 장면은 정두홍이 원래 표정만 갖고서 현장에서 따묵은 겁니다. 촬영 끝내고 ‘우리, 친구 묵자’ 하는 사인데. 그 친구 보면 쓸쓸한 소의 눈을 가졌다고 생각했거든요. 사실 무술감독이란 게 이 판에서 참 애매하잖아요. 액션에 대해서 잘 아는 감독도 없고. 해달라는 대로 해주고도 제 몫 못 받을 때도 있고. 그런 거 지금까지 맘속에 쌓아둬서 그런지 그런 눈망울이 나와요. 촬영장에서도 오성이가 링 위에서 연습하는 모습 바라보는 거 보면 그게 묻어나니까. 그래서 김현치 관장 발표장면 찍을 때 아, 드디어 나한테 기회가 오는구나 하는 느낌을 미리 풍겨달라고 했어요.

박찬욱 | 대사가 없는데도, 그런 느낌이 순간 오더라고.

Round8: 왜 결정적인 한마디가 없나?

#114. 라스베이거스 사막

새벽녘에 라스베이거스 시내를 빠져나온 김윤구 코치와 김득구는 해가 떠오르는 사막에 이르러 러닝을 멈춘다.

김득구: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김윤구: 응.

김득구: 코치님은요. 맨시니처럼 나중에 아들이 권투선수 한다면 하라 그러겠어요?

김윤구: 지가 하고 싶다 그러면 하라 그러지 뭐. 니는?

김득구: 나는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박찬욱 | 사막장면에서 김득구는 결정적인 한마디를 할 것 같은 분위기인데. 결국 하는 말은 잘 모르겠다?

곽경택 | 맨시니는 아버지도 히어로, 자신도 히어로 아닙니까. 근데 김득구가 보기에 아버지는 지저분한 존재거든요. 태생적인 콤플렉스 같은 게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다 곧 자기도 애 아버지가 되는 상황. 자문했을 때 나라도 모르겠다고 했을 것 같아 그랬심다.

박찬욱 | 그런데 이후 김득구가 뇌사상태에 빠진 뒤에 경미가 그가 살아서 돌아오는 꿈을 꾸는 장면 있잖아. 근데 그거 약간 헷갈리거든. 꿈을 통해서야 임신 사실을 알게 되는 것처럼 되어 있는데. 떠나기 전에 아이를 가졌다는 걸 보여줬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곽경택 | 그렇죠. 사실 시나리오에는 그보다 전에 호텔방에서 김득구가 애 장난감 총 하고, 태엽 안 감은 시계를 만지작거리는 게 있어요. 근데 시계는 느낌이 좋은데 아무래도 아이 장난감은 신파인 거예요. 고민하다가 포기하고 알 듯 모를 듯하게 가자고 한 게 사막을 선택한 거죠. 오만 짱구를 다 굴려도 쌈마이 숏만 떠올라서이기도 하고.

박찬욱 | 태엽 안 감은 시계는 그래도 좀 아까운걸. 차라리 경미가 득구의 목소리를 듣는 식으로 처리했으면 감상적인 위험은 피하지 않았을까.곽경택/나중에 녹음하면서 득구와 경미의 통화내용을 보이스 오버로 처리해서 넣어보긴 했는데, 역시 오버더라고.

박찬욱 | 유오성 같은 훌륭한 배우들은 좀 깨는 대사들도 눌러서 갈 줄 알거든. 난 그냥 배우들에게 맡겨. 숏이 안 떠오르면 배우의 클로즈업으로 가는 거고. 훌륭한 배우들은 그게 최고야. 보통 클로즈업이라고 하면 감상적이라고들 하지만, 믿을 만한 배우라면 달라지지.

Round9: 14회전을 보여주지 않은 이유는?

#120 시저스 펠라스 특설링

김득구에게 지시를 하는 김현치 관장.

김현치: 괜찮겠나? 인자 두번만 더 뛰믄 된다. 지금까지 잘 싸웠으니까 이자 참피온은 우리끼다. 저노마도 많이 지쳤으니까 경기 시작되면 나가자마자 왼쪽으로 돌아서 보디를 때리뿌라. 그라믄 오른쪽이 오픈이 되니까 나가자마자 한방 매기뿌라. 알았제. 응? 그렇게 알고 한번만 뛰자. 힘내고.

박찬욱 | 권투영화에서 야외 특설링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는데. 그것도 대낮에. 그래서 카메라가 득구 머리 위 하늘을 비추다 과거 득구가 살던 고향의 바다에 이르는 장면도 가능했던 것 같고.

곽경택 | 전혀 뒤집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요. 내부에서도 영화가 꼭 그럴 필요있냐면서, 실내 경기로 가자는 말이 나왔죠. 근데 그 경기, 야외에서 했다는 거 기억하는 사람이 많아요. 또 강렬한 라스베이거스 태양 아입니까. 거기에다 타인들의 시선이 둘러쳐져 있고. 난, 혼자다 하는 고립감을 강조하기에도 더 좋아보였심다.

박찬욱 | 쨍쨍한 햇살. 그거 되게 가혹한 느낌을 줘. 아, 14회전을 다 안 보여준 이유는 뭐야. 혹시 찍었어?

곽경택 | 안 찍었습니다.

박찬욱 | 어떤 사람은 그러더라. 정면 승부를 회피하는 거 아니냐고. 곽경택/시나리오에는 14회 이전에 강한 펀치를 맞고 바닥에 쓰러지고, 심판의 팔이 올라가고 라스베이거스에 몰려든 관중들 환호하고, 그러는 동안 김득구는 시력과 청력을 잃어가면서 죽어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촬영 전날 어떤 생각이 드냐면. 다른 감독이 이 사람 이야기를 해도 내랑 똑같이 할 것 같은 겁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려면 내 나름대로 이 사람의 죽음에 대한 해석이 들어가야 안 되겠나 싶데에. 그것의 근거가 됐던 게 사인이었습니다. 펀치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됐다기보다는, 이미 실핏줄 자체가 지금껏 살아오던 피곤함으로 인해 이미 약해졌다는 거지요. 그때가 왔을 뿐 맞고 죽은 것은 아니다, 뭐 그런 거죠.

박찬욱 | 클라이맥스를 맞고 쓰러지는 순간에 둔 게 아닌 것도 그런 이유겠네.

곽경택 | 그렇지요. 또다시 링 가운데로 나가면서 이 피곤한 인생 여정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거다 하는 느낌만 주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링 가운데로 나가면서 김득구의 깊은 한숨으로 바꿨어요. 많은 사람들이 링에서 쓰러졌다 일어나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걸 그때처럼 TV화면으로 보여주자, 그리고 여기에 약혼녀인 경미가 그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실제처럼 가자고 정리했던 거예요. 찍지 않은 건 찍으면 결국 쓸 것 같아서.

박찬욱 | 무서운 결심이었구먼. 다르게 찍는 건 무엇을 안 찍느냐도 중요한 것 같애. 그런데 그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지루하고 길게 보여주는 것도 그 순간을 오히려 강조해줬을지도 몰라.

곽경택 | 앞에서 안 보여줬다면 전체 경기의 호흡이나 리듬을 고려했겠지요.

박찬욱 | 아니, 내 말은 좀 다른데. 굴곡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단지 길기만 했더라도 한숨 자체가 더 깊게 느껴졌을 것 같애.

Round10: 정말 그렇게 무식하게 찍었나?

#135 엔딩-동아체육관

박찬욱 | 사실 엔딩 들었을 때 말로만 듣는데도 눈물이 핑 돌았어. 막상 영화 보면 재미없겠다 할 정도로. 그런데 직접 보니까 기술적으로도 고생했구나 싶더라.

곽경택 | 이틀 동안 꼬박 찍었어요. 세트에서 찍었으면 앵글도 좋았을 텐데. 부감으로 끝낼 수도 있었을 테고.

박찬욱 | 모션컨트롤 카메라로 찍은 거지?

곽경택 | 그렇죠. 그런데 로케이션이라 건물 안에 설치된 기둥을 피해야 하니까. 아무래도 동선이 안 나오죠.

박찬욱 | 그럼 인물들마다 다 따로 찍은 거야? 데이터 계산해서?

곽경택 | 안 그러면 수가 없으니까.

박찬욱 | 무식하게 찍었네. 정말. <데드링거>만 하더라도 세트를 무지 높이 쌓고 찍었다던데. 아예 세트를 안 지은 건가?

곽경택 | 아니오. 짓다가 미술팀과 이야기가 원활하게 진행이 안 돼서 결국 세트를 포기했죠. 아무래도 세트로 가다보면, 창문 너머의 빛이나 느낌은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그냥 로케이션으로 가자 했던 거죠. 그 상황에서 홍경표 형은 어떻게라도 해보겠다고 꼼지락댔는데 그런 걸 보면 대단한 서바이버 기질 같은 게 있어요.

박찬욱 | 헝그리 정신이지. <친구> 때처럼 시간이 늘어나서 편집할 때 고생 안 했어?

곽경택 | 그땐 길게 찍어놓고 엄청 고민했잖아요. 그래서 이번엔 현장편집하면서 시간 계산해놓고 비교하고 되도록이면 맞춰가려고 노력했죠.

박찬욱 | 찍고 나서 어땠는데?

곽경택 | 뭐가 가장 두려웠냐면, 김득구라는 사람. 자기 이름을 알아주길 바랐고, 외로웠던 사람이잖아요. 산 사람 같으면 찾아가서 이거, 그냥 영화일 뿐이라고 설득하고 자의적인 해석 같은 걸 내릴 수도 있었을 텐데. 내내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 같아. 그게 좀 걸렸어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하이앵글로 항상 뒤통수를 내려다보는 느낌 같은 거.

박찬욱 | 다음 작품 시작해야 짐을 덜겠네.

곽경택 | 형님은 다음 작품 준비하고 계시지 않나요?

박찬욱 | 인혁당 이야기 생각하고는 있는데, 8명의 생목숨이 죽었는데 어떻게 접근할지 걱정이 좀 되네.

곽경택 | 난, 전에 회고록을 읽은 적이 있어 김형욱씨 이야기를 해볼까, 궁리중인데 뭘 할지는 <챔피언>을 좀더 두고본 다음 결정해야 할 것 같네요.

Zoom-out

<챔피언>을 놓고 10라운드를 치룬 두 감독. 지치지도 않았나 보다. 링에서 내려오자마자 곽경택 감독은 쉴 틈 주지않고 박찬욱 감독에게 ‘권주’하듯 김재규에 관한 아이템을 언제 한번 해보라며 건넨다. “그럼, 박정희 최후의 만찬으로부터 영화를 시작해야 하나”라고 물으며 흥미를 보이는 박찬욱 감독. 그러나 이내 “배후에 누가 있었는지 하는 사실관계를 확인하기가 힘들어 아무래도 어렵지 않겠느냐”는 박찬욱 감독 말에 곽경택 감독은 “아내나 딸을 등장시켜 퍼스널한 시각으로 큰 이야기를 다룰 수도 있을 것”이라고 재촉한다. “유머가 들어갈 자리도 없지 않을까”라고 한발 빼는 박찬욱 감독에게 “찾으면 된다니까요. 감독님이라면 가능할겁니다”라고 꼬드긴다. 이제 4편을 만들었을 뿐인, 두 감독의 끝없는 구상은 자리를 뜬 이후에도 약속장소까지 태워주겠다는 곽경택 감독의 차 안에서 계속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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