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우(유희제)는 되는 일이 하나 없다. 야구선수 생활을 청산한 후 야구용품 사업을 시작하지만 실패했고, 지금은 친구 집에 얹혀살며 내세울 게 없으니 목소리만 드높인다. 그런 그에게 방울 하나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그 틈으로 보이는 예지몽은 건우에게 일확천금을 획득할 기회를 선물한다. 하지만 영화 좀 본 관객은 알 것이다. 잠깐의 요행은 주인공에게 오랜 불운을 선사한다는 걸. 꿈조차 꿀 수 없던 건우는 기껏 꾼 꿈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
- 여러 꿈을 오가는 이야기다 보니 이 작품을 텍스트로만 접했을 때 훨씬 난해했을 것 같다.
시나리오만 읽었을 땐 영화를 단번에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분명 촬영과 편집이 만들어내는 꿈속 세계의 구현이 중요할 텐데, 영화가 그 환상성을 어떻게 만들어낼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광호 감독님과 처음 만났을 때 영화에 대한 청사진을 질문했다. 이를테면 건우와 미나(김세원)의 꿈이 뒤바뀐다고 해서 서로가 타인의 삶을 정말 이해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다행히 감독님의 답을 들으니 이 사람의 머릿속에는 영화에 대한 계획과 이미지가 상당히 선명해 믿고 따를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 실제로 학창 시절 태권도를 전공했다고 들었다. 연극 <펜스 너머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해>에서 건우와 같은 야구선수를 연기한 적도 있고. 작중 건우의 상황에 비추어 아무래도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되던가.
태권도를 6살에 시작해 18살에 부상으로 그만두었다. 당시로선 인생 전부를 태권도에 쏟아 부은 셈인데, 6주 정도를 입원해 누워 있으며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운동에 온 힘을 쏟다가 루틴이 사라지니 에너지를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겠더라. 운이 좋게 나는 그때 연기를 찾아 연극반에 들어갔지만 건우는 자기와 어울리는 대안을 찾지 못했다. ‘금쪽이’ 같은 사람인데, 그런 이에게도 무언가를 성취하려고 물심양면 애썼던 순간이 분명 존재했을 터다. 그래서 더욱 지금의 자신을 인정 못할지도 모른다. 나를 포함해 건우와 같은 시간을 거쳐본 적 있는 관객이라면 인물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다. 관객들이 건우를 마냥 한심해하기보다는 머리 한번 쓰다듬어주고 토닥여주면 좋겠다. 건우 같은 인물형도 누군가에겐 존재하는 것만으로 위로가 될 수 있다.
- 언급한 대로 건우는 남은 게 자존심밖에 없어 과도한 자기방어와 공격성을 보이고, 본인이 빠질 수렁을 스스로 파는 인물이다. 그런데 건우를 마냥 기막혀하기보다 염려하게 된다.
그 부분이 보이길 바랐다. 그래야 건우가 영화 후반 미나에게 온정의 손길을 건네고, 틱틱대다가도 자기보다 어린 소녀의 이야기를 들으려 귀를 기울일 때 진정성이 생길 수 있겠더라. 그런 작은 마음들을 모아 영화 속 건우를 만들었다.
- 건우를 꿈의 세계로 이끄는 요섭(이하랑)을 어떤 존재로 상정했나.
답답한 현실을 벗어날 길은 여러 갈래지만 의지와 열정이 전소한 사람에겐 붙들고 바라볼 게 환상뿐이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건 분명 얄팍한 마음인데 그 얄팍한 수에 의존해 삶을 살아갈 원동력을 얻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요섭을 연기한 이하랑 배우가 정말 잘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장에서도 하랑 배우만 등장하면 진짜 요정이 나타난 듯 분위기가 달라졌다.
- 서로의 꿈속으로 들어가며 상대를 이해한다는 설정이 일면 연기와 닮아있다. 건우도 미나도 남이 되어봄으로써 비로소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니까.
배우로서 배역에 다가갈 때 여러 방법을 쓰지만 결국 이 캐릭터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대하는지를 상상하려고 애쓴다. 타인의 꿈을 통해 누군가에게 공감하려는 설정이 배우라는 직업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와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요즘엔 다들 사는 게 바쁘고 힘들다 보니 다른 이의 심도를 굳이 이해하는 수고를 들이지 않는다. 내겐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이 일을 지속하는 이유 중 하나다. 또 연기를 통해 나 자신이 더 넓어지고 깊어진다는 걸 느낀다. 배우 생활이 내게 주는 좋은 일이 남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치면 좋겠다. 그러면 좀더 따뜻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 지난 2년간 경사가 많았다. 올해 공동대표이자 제작 PD, 소속 배우로 일하는 극단 ‘불의 전차’가 연극 <장소>로 백상예술대상 젊은연극상을 수상했다. 짧은 출연에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 <커넥션>과 <김부장>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고.
동료 아홉명과 극단을 꾸린 지 11년이 된 해에 상을 받았다. 불의 전차의 행보를 인정받은 것 같아 다음 스텝을 향해 나아갈 힘을 얻었다. 개인적으로도 내가 가려는 길이 잘못된 방향은 아니구나 싶어 기뻤다. 또 <신병3>와 <김부장>을 찍고 나서 많은 분들이 길에서도 알아봐주고 인사를 건넨다. 작품에 힘입어 내일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8월까지 연극 <더 컴업펀스>를, 9월까지 <쇄골에 천사가 잠들고 있다>를 잘 마치는 게 목표다. 11월엔 국립정동극장 세실에서 <장소>를 재공연한다. 그리고 12월엔 미국의 현대 희곡 <We Borrowed Brokenness>를 번안해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작품명을 밝히긴 이르지만 드라마 차기작도 한 작품 있다.


